여성의 임신중절권을 헌법의 권리로 인정한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파기하기로 다수 대법관이 의견을 모은 미국 대법원 회의록과 판결문 초안이 유출된 데 대한 전반적인 내용은 어제 살펴봤습니다.
민주당과 진보 진영, 시민 단체와 수많은 여성은 대법원의 ‘유출된 잠재적 판결’에 격분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워런(Elizabeth Warren, 민주, 매사추세츠) 상원의원이 평소보다 격앙된 어조로 한 여러 인터뷰가 소개됐죠. 다음 영상도 그중 하나입니다.
워런 의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체 미국인의 69%가 로 대 웨이드 판결이 계속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레드 스테이트, 블루 스테이트를 막론하고 전체 미국인의 의견이에요. 그런데 지금 대법원은 그걸 뒤집으려 하고 있어요. 더 늦기 전에 의회가 나서서 로 대 웨이드가 보장한 임신중절권을 연방법(law of the land)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민주당은 재빨리 움직였습니다. 워런 의원의 말대로 임신중절권을 연방법에 명시해놓기로 한 거죠.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인 척 슈머(Chuck Schumer, 뉴욕) 의원은 오는 11일 해당 법안을 곧바로 상원 전체 표결에 부치겠다고 밝혔습니다.
현재 미국 상원은 민주당과 공화당이 정확히 50석씩 나눠 가지고 있습니다. 표가 50:50으로 나뉠 때 부통령이 타이 브레이커가 되므로 해리스 부통령이 속한 민주당이 다수당이죠. 그러나 상원의원은 한 명 한 명이 필리버스터라는 막강한 거부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필리버스터를 무력화하려면 절대다수 의석인 60석이 필요합니다. 정부 예산과 관련한 긴급 법안 등 일부 필리버스터를 적용하지 않는 분야가 있지만, 임신중절권 보장법안은 필리버스터를 피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그래서 수요일 표결은 상원의원 중에 누가 로 대 웨이드를 파기하는 데 찬성했는지 공개하는 것이 목적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즉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지키자는 쪽과 뒤엎자는 쪽을 명확히 갈라놓으면 분노한 (대다수) 유권자들이 후자에 속한 공화당 의원과 정치인들을 심판해줄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슈머 원내대표는 “공화당은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도 했는데, 역사의 심판은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테니 당장 이번 중간선거에서 유권자들이 과연 공화당을 심판할지 짚어보겠습니다.
워런 의원의 발언 가운데 미국인 69%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부분은 대부분 여론조사에서 거듭 확인되는 사실입니다. 정확한 수치는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미국인 세 명 중 두 명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지켜야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공화당이 로 대 웨이드를 파기하는 데 앞장섰다는 이유로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표로 심판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입니다. 워싱턴포스트의 칼럼니스트 마크 티센(Marc Thiessen)이 몇 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
우선 미국인 대부분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이 유지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파기한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르는 미국인도 많습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파기된다고 미국에서 임신중절 수술을 받는 게 곧바로 불법이 되는 건 아닙니다. 대신 로 대 웨이드 판결 이후 지난 50년 동안은 주정부가 임신중절 수술을 제약하거나 금지하는 게 (대법원판결을 거스르므로) 위헌이었습니다. 이 판결을 뒤집음으로써 이제는 임신중절 수술의 불법 또는 범죄 여부를 주정부가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주, 어느 지역에 사느냐에 따라 이번 판결로 인해 받을 영향이 판이한 겁니다.
그런데 로 대 웨이드 판결에 관한 여론을 곧바로 임신중절권 전반에 대한 의견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임신중절에 관한 미국 내 여론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물론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요.
먼저 임신 주수에 따라 임신중절에 관한 의견이 달라집니다. 2018년 갤럽 여론조사를 보면, 임신부터 출산까지 시기를 세 구간으로 나눴을 때 초기 12주(first trimester)까지는 임신중절을 합법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미국인이 60%입니다. 그러나 이 수치는 중기(second trimester)에는 28%로 급락하고, 후기(third trimester)에는 13%로 더 낮아지죠. 민주당이 이번 대법원 문서 유출을 중간선거의 주요 이슈로 삼는다면 임신 초기의 중절 수술을 합법화하고 지원하는 문제에선 지지를 받겠지만, 중기, 후기로 갈수록 적잖은 반발에 부딪힐 겁니다.
이 사안이 얼마나 복잡한 문제인지 보여주는 또 다른 여론조사를 보죠. 퓨리서치 센터가 지난 3월 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3%는 다음 두 가지 모순되는 주장에 모두 동의했습니다.
어쨌든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미국인이 전체의 2/3라고 해서 그 사람들이 곧 진보 진영에서 말하는 “모든 임신중절 수술의 완전한 합법화”에 동의한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최근 들어 민주당은 임신 주수에 관계없이, 꼭 어떤 이유가 있지 않더라도 임신부가 원하면 임신을 안전하게, 합법적으로 중단할 수 있도록 법을 바꾸고 제도를 구축하는 데 집중해왔습니다. 한때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임신중절은 안전하고, 합법적이되 되도록 자주 일어나지는 말아야 할 일(rare)”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2012년 민주당은 정책 기조에서 “rare” 부분을 뺐습니다. 대신 경제적인 여력이 충분치 않다면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해서라도 임신중절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했고, 2016년엔 연방 정부가 임신중절 수술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걸 제한한 하이드 수정안을 폐지하는 쪽으로 당론을 정했습니다. 평생 하이드 수정안을 지지해온 조 바이든은 2020년 대선을 앞두고 당내 주류 의견에 따라 하이드 수정안 폐지를 공약에 포함했습니다. 민주당의 당론, 희망과 달리 임신중절 수술에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하는 데는 대부분 미국인이 반대합니다. 선거에서 들고나왔을 때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이슈라는 뜻입니다.
사실 임신중단권에 관한 이슈가 과연 중간선거의 판세를 뒤흔들 수 있느냐부터 생각해봐야 합니다. 지난달 이코노미스트와 유거브가 함께 진행한 여론조사를 보면, 이번 선거에서 투표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이슈로 임신중단권이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꼽은 사람은 유권자의 4%에 그쳤습니다. 40년 만에 최악의 인플레이션, 일자리, 이민, 기후변화,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건강보험, 세금, 인종차별, 치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제가 이미 유권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데, 임신중단권에 관한 논쟁이 얼마나 주목받을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기본적으로 ‘여당 심판’ 분위기가 조성될 수밖에 없는 중간선거에서 인플레이션, 세금, 치안 등 수많은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민주당은 공격보다는 수비하는 쪽이 될 텐데, 과연 로 대 웨이드 판결에 관한 이슈가 수비를 잠시 헐겁게 해놓고서라도 공격에 쓸 만한 카드가 될까요? 결정은 민주당 지도부와 각 후보의 몫이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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