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시대상을 반영하는 영상물 등급제도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 영상물의 시청이 허용된 연령을 규정하는 영상물 등급 제도는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서 도입하고 있는 제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영상물등급위원회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영상물의 주제, 폭력성, 선정성, 언어, 공포, 약물, 모방 위험 등의 기준을 적용해 영상물의 등급을 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무리 일정한 기준에 따라 판단을 한다 해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기준 자체도 조금씩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이코노미스트는 영국의 영화 등급 제도의 변화에 대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사진=영상물등급위원회 영상 갈무리

4월 13일 자 해당 기사는 특히 “언어” 부문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영화에 특정 단어(예를 들어 “fuck”)가 나오면 그것만으로 15세 이상, 또는 18세 이상의 등급을 부여했지만, 이제는 맥락을 고려하는 쪽으로 추세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같은 단어를 써도 친구들끼리 욕설을 주고받는 장면과 “힘센 남성이 약한 어린이나 여성을 향해 욕설하는 장면”은 맥락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특정 단어가 갖는 “힘”, 영향력도 시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영국에서 영상물 등급을 책임지는 영국영화등급위원회(British Board of Film Classification, BBFC)는 언어의 변화를 살피기 위해 4년마다 시민 1만 명에게 의견을 묻습니다.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 운동이 미국을 휩쓸고 지나간 작년에는 영화 속 차별에 대한 특별 자문을 실시했는데, 실제로 예전에는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졌던 영화 속 언어에 시민들이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변화가 감지되기도 했죠. 흑인을 비하하는 이른바 n으로 시작하는 단어가 들어간 영화가 PG(보호자 동반 관람가) 등급을 받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이보다 높은 12세 미만 보호자 동반 필수, 또는 12세 미만 관람불가 등급을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영화등급위원회가 단순히 영상물에 연령 등급을 매기는 역할 뿐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의 가치관과 윤리를 기록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분석했습니다. 영상물 등급 제도의 긴 역사를 살펴보면, 한때는 영국 시청자들에게 불쾌감을 준다고 여겨지던 인도 식민지의 악독한 영국 공무원, 인종 간 결혼, 신성모독 등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습니다.

작년 5월 뉴욕타임스에 실린 한 정신의학자의 부고 기사는 미국 영상물 등급 제도의 변화상을 잘 보여줍니다. 2021년 4월 13일 뉴욕의 한 병원에서 96세의 나이로 숨진 애런 스턴 박사는 1971~1974년 미국영화협회(Motion Picture Associaton of America)의 자체 등급위원장을 지낸 인물로, 1930년대에 만들어진, 윤리적, 종교적으로 매우 엄격했던 영화 제작 검열 제도, 이른바 “프로덕션 코드(Production Code)”를 현행 등급제로 대체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폭력성, 선정성, 언어 등을 기준으로 영화에 등급을 매겨, 관객들에게 영화에 대한 정보를 미리 준다는 취지의 현행 등급제는 스턴 박사의 활동 시기에 정립된 것입니다.

그런 그 역시도 과도한 권력을 휘두른다는 뒷세대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폭력에는 관대하면서 섹스에는 청도교 수준으로 엄격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요. 그럼에도 스턴 박사는 영상물 등급제가 의회나 법원 등에 의한 더 강도 높은 검열과 규제를 막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또 사람들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려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제도를 변호했습니다.

그런 그가 생전에 남긴 말들은 등급제를 계속해서 운영해 갈 우리 모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줍니다. 그는 “사회적 변화가 등급제를 시대착오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고도 말했고, “등급을 매길 수 있는 것은 영상에 명백히 드러난 요소일 뿐, 그 요소 뒤에 자리한 윤리나 사상에까지 등급을 매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종교, 지도자, 평론가, 관객 개인의 몫이다”라고도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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