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푸틴이 찾는 폭스뉴스, 젤렌스키 찾아간 애틀란틱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두 달이 다 돼 갑니다.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는 전 세계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잇단 군사작전과 민간인 학살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철저한 언론 통제와 검열로 러시아 내부에선 전쟁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찾아보기 어려워졌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거짓말인 가짜뉴스는 드뭅니다. 대신 하나부터 아홉까지는 사실이거나 사실로 추정할 만한 이야기를 하다가 열 번째에 슬쩍 거짓말이나 허위 정보를 끼워 넣고서는 뉴스 행세를 하는 가짜뉴스가 대부분이죠. “전쟁범죄는 오히려 우크라이나가 짓고 있다”는 가짜뉴스를 되풀이하고 있는 러시아는 그럴듯한 근거를 대고 싶어 안달이 나 있습니다. 러시아를 규탄하는 서방 언론사가 대부분인데, 그중에 러시아 편을 들어주는 곳이 있으면 무척 반가울 겁니다. 폭스뉴스가 정확히 그 이유로 러시아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습니다. 크렘린과 폭스뉴스가 거대한 반향실을 구축한 듯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군이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으로 후퇴하면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는 총성, 포성이 줄었습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키이우를 방문해 젤렌스키 대통령과 함께 거리를 걷기도 했죠. 애틀란틱은 제프리 골드버그 편집장과 앤 아펠바움 기자가 직접 키이우로 갔습니다. 그리고 두 달 가까이 수도를 지키며 전쟁을 이끌고 있는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나 인터뷰 기사를 썼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러시아군을 상대로 대단한 승리를 거뒀지만, 그를 위해 치른 대가를 생각하면 전혀 기뻐할 수 없다며, 전 세계가 더 확실하고 단호히 우크라이나를 지원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폭스뉴스는 사실보다 한쪽으로 매우 치우친 정견을 뉴스 프로그램으로 내보내면서 선정성을 앞세워 시청률과 수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뉴스의 본령이어야 할 신뢰받는 언론 매체라는 타이틀은 놓치고 말았습니다. 폭스는 진영 논리에 빠진 나머지 트럼프 대통령이 했다면 아마 입이 닳도록 칭찬했을 일을 바이든 대통령이 한다는 이유만으로 덮어놓고 비난하곤 합니다. 미국 정부가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를 규제하고 처벌하기 위해 하는 거의 모든 정책이 폭스뉴스에서는 미국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위입니다. (구체적인 논리는 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 더 쓰지 않습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러시아 국영 매체들이 폭스 뉴스를 인용하는 횟수가 부쩍 늘었습니다. 사진=뉴욕타임스 기사 갈무리

앞서 미국 정부가 올리가르히(Олигархи)를 규제하겠다며 이들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하자 폭스의 메인 앵커 가운데 한 명인 터커 칼슨은 “지금껏 미국 역사상 어떤 정부도 그런 일을 벌인 적이 없다. 미국 정부가 오랫동안 지켜온 원칙이 있다면 바로 법치주의(rule of law)의 원칙이다.”라며, 이 결정을 맹비난했습니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궤변인데, 러시아 국영 매체 리아 노보스티는 곧바로 이 보도를 인용했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적이 없다며 거짓말을 일삼다가 국제사회에서 왕따를 자초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도 지난달 “폭스뉴스야말로 서방 세계에 남은 몇 안 되는 훌륭한 독립 언론”이라고 추켜세웠습니다. 앞서 프리미엄 콘텐츠에 소개한 대로 냉전이 끝난 지 30여 년이 흐른 지금, 미국 극우파와 푸틴이 한목소리를 내는 걸 보면 이념 지형을 정말 다시 그려야 할 것 같습니다.

뉴욕타임스는 러시아 언론이 인용하는 폭스뉴스의 주장, 기사를 크게 네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1. 나토가 동진했기 때문에 러시아는 자위 차원에서 이를 견제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
  2.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생화학무기 연구소를 비밀리에 운영하고 있다는 음모론.
  3. 서방 국가들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기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평화협상에 임하지 않고 계속해서 러시아인들을 학살하고 있다는 주장.
  4. 바이든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향한 비판과 음모론.

폭스는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 정권과 가짜뉴스를 주고받으며 세상을 갈라놓고 있지만, 세상에는 전쟁의 참상을 정확히 보도하고 피해자와 희생자의 목소리를 알리려 노력하는 언론 매체도 많습니다. 이 매체들은 폭스보다 시청률이 낮고, 영향력도 덜하겠지만 최소한 언론이 해야 할 기본을 지키고 있다는 점은 인정받아야 할 것입니다. 애틀란틱도 그런 매체 중 하나죠. 애틀란틱은 편집장과 에이스 기자가 직접 키이우에 가서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 국회가 젤렌스키 대통령을 화상으로 초청해 이야기를 나눴죠. 그런데 참석한 국회의원들도 적었고, 대체로 심드렁한 분위기에서 하나 마나 한, 어쩌면 안 하느니만 못한 요식 행위처럼 끝나고 말아 크게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우리 국회에서 한 말은 애틀란틱 기자들에게 한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일관적으로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싸울 수 있게 더 많이 지원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어렵게 국회 행사에 모셔놓고 정작 이야기는 듣지 않은 분들을 위해 애틀란틱이 정리한 인터뷰의 핵심을 추렸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애틀란틱의 골드버그 편집장, 아펠바움 기자와 인터뷰하는 모습. 사진=애틀란틱 기사 갈무리

러시아군이 작전상 잠시 후퇴한 현재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는 어느 정도 전쟁 이전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국민은 러시아가 전열을 다시 갖추고 초토화 작전을 벌이며 다시 진격하면 지금까지 흘린 피보다 더 많은 희생을 겪더라도 주권을 지키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아직은 승리를 선언할 때가 아니”라고 말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계속해서 주권국가로 남을 때만 승리를 선언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를 위해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가 더 확실하고 전폭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줘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러시아의 침공을 막아내며 젤렌스키 대통령은 세계적으로 자유와 용기를 상징하는 지도자가 됐습니다. 그러나 젤렌스키의 언행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와는 거리가 멉니다. 애틀란틱의 두 기자가 받은 인상도 비슷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젤렌스키 대통령은 세간의 평가대로 “다른 이와 공감할 줄 아는, 평범한 시민”이었습니다. 그저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말투와 행동거지는 냉혈한 독재자의 전형에 가까운 푸틴과 대조를 이뤘습니다.

애틀란틱이 젤렌스키 대통령을 인터뷰한 날은 4월 12일 화요일이었습니다. 부활절을 앞두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고난주간이었죠.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인구 중에 많지는 않은 유대인으로, 기사가 나간 4월 15일은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성금요일이지만, 유대교에서도 핍박받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탈출한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의 첫날입니다. 자연스레 종교에 관한 이야기로 질문을 시작했는데,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의 침공을 지켜보면서 종교의 가치에 대해 깊은 회의감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은 하나님께 러시아 군대에 힘을 달라고 기도했죠. 그 힘은 결국 우크라이나 사람을 죽이는 데 쓰일 텐데, 정말 종교가 이래도 되는 건가 싶더라고요. 러시아는 러시아 정교회 신자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예요. 종파는 다를지언정 엄연한 기독교 국가인데, 교리로는 평화와 사랑을 말하는 종교를 믿는 나라가 어떻게 이렇게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젤렌스키 대통령은 요즘 전 세계 곳곳에 통화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씁니다. 각국 행정부, 의회, 싱크탱크와 쉴 틈 없이 회의가 잡혀있는데, 매번 다른 회의에서 받는 질문은 놀랍게도 거의 같다고 합니다. 바로 지금 러시아와 맞서 싸우는 데 필요한 무기가 무엇인지 이야기해달라는 질문이죠.

솔직히 지금껏 안 들어본, 참신한 질문이 듣고 싶어요. 이미 수도 없이 답했던 질문에 똑같은 답을 되풀이하는 일이 분명 즐거운 일은 아니죠. 심지어 몇 주 전에 똑같은 질문을 받고 답을 들었을 분이 또 같은 걸 물어보실 때는 혼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답을 하죠. 빌 머레이가 주연한 영화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 아시나요? 제가 딱 그 신세 같아요.

물론 젤렌스키 대통령도 무기 지원이 말처럼 쉽게 이뤄지기 어려운 사정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시간 여유가 충분해서 천천히 무기고를 채워두려고 지원을 요청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하는 러시아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당장 필요한 것들이다 보니 재촉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에 따라 상대방의 다급함 혹은 느긋함을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젤렌스키 대통령도 전쟁을 통해 몸소 깨달았습니다.

우리를 지원해주는 모든 나라 정부와 군, 시민사회에 정말 깊이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다만 전쟁으로 부모, 자식을 잃고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할 걱정을 해야 하는 우크라이나 사람들과는 처한 상황이 다르다 보니 아무래도 우리가 얼마나 절실하게 무기를 원하는지 다른 나라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요. 저만 해도 한 번은 마리풀 시장, 군사령관과 통화를 하는데, 거기서 “지금 당장 지원을 요청한다, 4시간밖에 시간이 없다”고 했거든요. 근데 솔직히 키이우에선 4시간이 무슨 의미인지 한 번에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키이우에서도 이해 못하는 걸 워싱턴에서 하기는 더 어렵겠죠.

국제사회의 무기 지원이나 러시아를 향한 경제 제재가 더디게 진행되는 것도 안타깝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 정부가 모든 정보를 통제하며 러시아 사람들을 완전히 속이고 기만하는 전략이 통하는 점이 더 두렵고, 걱정된다고 말했습니다. 푸틴이, 러시아군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아야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고 범죄자를 처벌할 수 있을 텐데, 푸틴은 아예 가상의 다른 세상을 만들고는 거기에 모든 러시아 국민들을 가둬놓고 있습니다. 러시아 정부가 독립언론을 탄압, 폐간하고 풍자나 유머에도 과할 정도로 단호히 대응하는 이유에 관해 코미디언이자 배우 출신인 젤렌스키 대통령은 진실의 힘을 말했습니다.

푸틴이 유머를 두려워할까요? 당연하죠. 제대로 된 유머와 풍자는 깊은 곳에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을 담고 있거든요. 그게 독재자의 역린을 건드리는 거죠. 심지어 고대 왕정 사회에서도 어릿광대는 진실을 녹여 세상을 풍자하곤 했잖아요. 지금의 러시아는 그럴 수 없는 상태인 거죠.

전체주의의 길을 택한 러시아와 달리 민주주의 제도와 시민사회의 힘을 믿기로 한 우크라이나에는 유머가 남아있을까요? 전쟁통에도 삶은 이어지고, 일상이 있는 곳에는 분명 잠시나마 전쟁의 참상을 잊게 해주는 유머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삶의 터전도 파괴된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아픔을 아주 잠시 유머로 승화할 수는 있을지언정 어쩌면 영원히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침략군과 싸우다 전사한 용기 있는 군인들도 많지만, 너무 많은 시민이 전쟁 때문에 고통 속에 죽었어요. 아이들은 공습을 피해 창고에 숨어있다가 동상에 걸렸고, 여성들은 강간당했고, 노인들은 굶주리다가 죽어갔어요. 길을 가다가 저격수가 쏜 총에 맞아 죽은 사람도 너무 많아요. 남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결국 다 이렇게 죽은 이들의 가족이고 친구일 텐데, 과연 러시아군을 물리친다고 기뻐할 수 있을까요? 우크라이나가 주권을 끝내 지켜내더라도 이들은 승리의 기쁨을 느끼지 못할 겁니다.

ingppoo

뉴스페퍼민트에서 주로 세계, 스포츠 관련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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