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2주가 지난 시점에 쓴 또 다른 전쟁 관련 분석입니다.
전쟁 초기, 국내 언론에 자주 이름이 등장한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학교 교수 같은 소위 ‘안보 전문가’들의 논의는 지나치게 강대국의 관점에서만 이번 갈등을 바라본 나머지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겪는 고통이나 강대국이 일방적으로 일으킨 전쟁으로 인한 참상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거대한 체스판에서 국력이 쇠퇴하는 러시아가 손에 쥔 핵무기를 이용해 뭐라도 하려고 하는 한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다는 식의 분석이죠.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뒤에 강대국의 논리에 휘말려 전쟁을 겪었고, 아직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한국에서 읽기엔 이렇게 철저히 강대국의 시선에서 내린 평가와 분석이 때로는 거북합니다.
그러다 복스에서 팟캐스트 복스 컨버세이션을 진행하는 션 일링(Sean Illing) 기자가 다트머스대학교의 윌리엄 울포스(William Wohlforth) 교수와 나눈 대담을 읽었습니다. 냉전 이후의 세계 질서, 특히 러시아의 외교 정책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울포스 교수의 시각에도 물론 현실주의와 강대국의 논리가 담겼습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이 우크라이나를 넘어 전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대한 울포스 교수의 단호한 답변을 보고 이번 대담을 소개했습니다.
Q. 푸틴의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우리가 알던 기존의 ‘세계 질서’는 끝났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A. 소련이 붕괴, 해체하면서 세계 질서는 초강대국 미국을 중심으로 재편됐습니다. 이 질서를 가장 탐탁지 않아 하던 인물 중 하나가 블라드미르 푸틴 대통령이고, 지금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벌이는 일은 결국, 소련 해체 이후 확립된 질서에 대한 도전이라고 볼 수 있죠.
냉전 이후 세계 질서의 핵심은 나토(NATO)가 뒷받침하는 유럽의 안보였습니다. 나토와 국경을 마주한 주권 국가는 원하면 누구든 나토에 가입할 수 있었습니다. 단, 러시아만 빼고요. 이를 반길 리 없는 푸틴은 나토의 국경선이 러시아와 가까워지자 행동에 나선 겁니다. 러시아의 침공을 정당화하려는 게 아닙니다. 일방적인 전쟁은 용납될 수 없는 행위지만, 푸틴의 논리는 그렇다는 거죠.
Q. 러시아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까요? 그럴 만한 힘이 있으니 도발에 나섰다고 봐야 할까요?
A.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당연하게도 수많은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우선 전장에선 우크라이나 군대가 모두의 예상보다 훨씬 더 잘 싸우고 있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군의 전력은 생각보다 훨씬 약해 보입니다.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가 러시아를 상대로 전례 없는 경제 제재를 가했는데, 이게 어떤 결과를 낳을지도 지금으로선 알기 어렵습니다.
러시아가 처음부터 원하는 바를 관철할 만한 힘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반대(No Ukraine in NATO)”하는 데서 더 나아가 “나토 회원국이 우크라이나에 군사 원조를 비롯해 어떤 지원도 할 수 없어야 한다(No NATO in Ukraine)”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곧 1997년으로 유럽의 지도를 되돌리자는 겁니다.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걸 러시아도 알고 있을 겁니다.
Q. 비단 ‘세계 질서’와 같은 거창한 개념을 떠올리지 않는 보통 사람들에게 이번 전쟁은 우크라이나를 넘어 전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지금 전쟁에 무엇이 걸려있다고 봐야 할까요?
A. 당연히 우크라이나라는 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죠.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자신의 문화, 국가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주권을 지키고자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습니다.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운명을 제외하면 미국과 러시아가 갈등의 양측에 있다는 점을 걱정해야겠죠. 지구상에 있는 핵무기의 90%가 미국과 러시아 두 나라에 있습니다. 갈등이 고조되고 격화되면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겁니다. 소련이 해체된 뒤 발칸 반도에서는 끔찍한 내전이 있었고, 알카에다 같은 테러 단체가 자행한 공격도 큰 충격을 줬지만, 분쟁 당사자 양측이 지구상의 핵무기 대부분을 보유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Q. 사실 이번 전쟁 이전까지 우리가 알던 ‘세계 질서’의 대원칙 가운데 하나가 힘 있는 나라가 무력으로 약소국을 굴복시킨 뒤 멋대로 침략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러시아가 그 질서를 깬 것 같아요.
A.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통해 원하는 바를 얼마나 관철하느냐에 달린 문제라고 봅니다. 비단 최근의 국제 질서가 아니라도 중세, 심지어 고대 국가들도 전쟁을 일으킬 때 명분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 경우가 많아요. 상대방을 정복할 힘을 갖춘 뒤에도 군사 작전을 펼 명분을 쌓으며 때를 기다린 사례도 많죠.
그런데 러시아는 모두가 알다시피 이 과정을 건너뛰었습니다. 8년 전에 멋대로 우크라이나 영토 일부를 병합한 뒤 우크라이나군이 자기들이 빼앗은 영토에 사는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다, 그래서 마침 우크라이나 국경에 집결해 있던 17만 대군을 동원해 자위적 차원의 군사 작전을 벌인 것이라는 푸틴의 설명을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Q. 전 세계가 한목소리로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리라 예상하셨나요?
A. 러시아는 속전속결로 우크라이나에게 항복을 받아낸 다음 이를 기정사실화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군과 시민들이 놀라울 만큼 효과적으로 러시아군을 막아 세웠죠. 이후 시간에 쫓기고 있는 건 분명 푸틴의 러시아였습니다. 다만 온 세상이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기엔 여전히 중간에서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중국, 인도 같은 나라도 있죠.
한편 유럽 여러 나라가 이번 일을 계기로 러시아를 완전히 새로 보게 된 점도 앞으로 상황이 전개되는 데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겁니다. 독일이나 프랑스 등 유럽연합 주요 국가 안에선 그동안 러시아가 설마 유럽과 전면전을 각오하고 도발을 일으키겠냐는 생각이 점점 커졌던 것 같습니다. 미국 정보 당국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임박했다고 연일 경고하던 때에도 예를 들어 독일의 태도는 다분히 미온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끝내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자 독일은 단호하게 태도를 바꿔 2차대전 종전 이후 처음으로 다른 나라에 무기를 원조하기 시작했습니다.
나토에 가입하지 않고 중립국의 위치를 지켜 온 스웨덴, 핀란드가 나토에 가입하겠다는 의향을 밝혔고, 오랫동안 수많은 전쟁에서 어느 편을 들지 않던 스위스마저 러시아 정부와 금융 기관의 자산을 동결해버렸습니다. 푸틴의 오판이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죠.
Q. 주요 국가들이 전쟁 억지력을 높일수록 군사력이 강해져 오히려 무력 충돌 위험이 커지는 “안보 딜레마”에 관해선 얼마나 우려하시나요?
A. 사실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전쟁이 격화된다는 건 특히 우크라이나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게 될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모든 논의에서 이 사실을 잊어선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러시아와 협상의 끈을 놓지 않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가장 피해야 하는 상황은 러시아가 어떻게 나오든 이를 제재하거나 억지하겠다는 메시지를 전할 창구마저 닫히는 상황입니다.
Q. 현재 위기에 놓인 ‘질서’를 되살릴 수도 있는 거죠?
A. 러시아를 향해 발동한 각종 제재가 실제로 타격을 입히고 러시아가 패퇴한다면 그럴 수 있겠죠. 다만 경제 제재가 실제 효과를 내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반면, 물리적인 전투의 결과는 훨씬 더 즉각적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러시아는 경제 제재의 효과가 나타나기 전에 군사력을 동원해 어떻게든 원하는 바를 관철하려 할 겁니다.
Q.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우려에 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 평가하기 어려운 사안이지만, 가능성이 크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푸틴은 러시아도 미국만큼 핵무기가 있다는 사실을 틈만 나면 모두에게 주지하려 애를 쓰고 있지만, 경제 제재에 맞서 핵무기를 사용할 것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갈등이 고조돼 나토 회원국과 러시아군 사이에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이 일어난다면, 상황이 훨씬 더 위험해지겠지만, 지금으로선 그렇게 되지 않게 양측이 선을 지킬 것으로 보입니다.
Q. 푸틴에게 일종의 퇴로를 확보해줘야 하는데 지금 상황이 그렇지 않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자신이 일으킨 전쟁에서 패퇴하는 게 자명해지면, 공멸의 길을 택하지 말란 법도 없잖아요.
A. 러시아를 오랫동안 관찰하고 연구해온 학자,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지금 푸틴이 예전의 푸틴과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우크라이나를 서방에 뺏길 바에야 우크라이나를 지도에서 지워버리는 게 낫다고 정말 생각하는 사람일지, 이번 침공에서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경우 패배를 인정하고 체면을 살리는 선에서 협상에 임할 생각이 있는지 등에 관해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지금 외교정책 담당자라면 제재에 좀 더 명확한 요건을 달아둘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우크라이나에서 병력을 철수하면 그 순간 모든 경제 제재도 없던 일로 한다.”는 메시지를 푸틴에게 분명히 전하는 거죠. 지금의 제재는 퇴로 없는 대결 양상으로 치닫는 듯해서 걱정입니다.
경제적으로 작은 나라가 아니고, 군사적으로는 여전히 강대국인 러시아를 너무 가혹하게 궁지로 모는 것은 위험하다는 사람들의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제재를 부과할 땐 반드시 협상에 임할 유인을 함께 제시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최악의 상황을 피하는 현실적인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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