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소리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는 인간이 평생을 고민해야 할 근본적인 질문 중 하나일 것입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느낌, 충동, 판단, 선택 등을 행동으로 옮길 때 우리는 가능한 한 이를 합리적으로 결정하려 하지만 대부분 우리는 그저 자동인형처럼 무의식적으로 이를 따릅니다. 때로는 이를 감정과 이성으로 구분하고 자신이 왜 그런 감정을 느꼈고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 회고할 때도 있지만 그런 일은 아주 드뭅니다.
언젠가 몇 편의 영화를 연출한 감독님 한 분과 만나 그분이 쓰고 있는 SF 시나리오의 설정에 대해 의견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날 나눈 이야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그분이 자신의 신은 자신의 기분이며, 만약 그런 기분이 들기만 한다면 자신은 생판 모르는 타인에게라도 아주 큰 돈을 그냥 줄 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이야기가 인상 깊었던 이유는 바로 제가 정확히 그와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삶 전체는 어떻게 하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지를, 곧 어떻게 하면 나의 기분을 따르지 않을 수 있을지를 찾아온 결과입니다. 물론 당연히 많은 경우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적어도 그 목표만은 분명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이런 정반대의 두 가지 태도 중 무엇이 더 옳은지 쉽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학적으로도 쉽게 이유를 댈 수 있습니다. 곧, 우리가 느끼는 기분 대부분은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자신에게 이로운 결과를 쉽게 얻도록 조정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고플 때 음식을 찾고 배가 부르면 음식을 더 먹지 않는 우리 몸의 메커니즘은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목이 마르거나 화장실을 가는 것, 춥거나 더울 때 이를 피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우리가 현대인의 조건과 원시인의 조건을 비교하며 자신의 본능과 싸울 것을 강조하지만, 사실 대부분 상황에서 본능은 우리에게 이로운 결과를 주며 실제로 우리는 이를 따르며 살아갑니다.
이런 내면의 소리의 중요성은 신체적 상황에 그치지 않습니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질 때, 도움을 필요한 이들이 있을 때, 호감 가는 사람이 있을 때 역시 우리는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되며, 그 소리를 따라야 할지를 다시 고민하게 됩니다.
지난 2월 행동과학자 블로그에 올라온 한 실험을 보고 나서 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시카고 경영대학원의 에일렛 피쉬바흐는 시카고의 유명한 코미디 클럽인 세컨드 시티(The Second City)에서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주목을 끄는 훈련을 할 때 불편함을 잘 참는 사람들이 더 성장한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위 기사에서 처음 눈길을 끈 것은 바로 첫 문장입니다. 세컨드 시티는 티나 페이, 스티븐 콜베르, 스티브 카렐이 데뷔한 극단이라는 것입니다. 세 명 다 너무나 전설적인 배우들이지요. 특히 미드 오피스에서 스티브 카렐의 연기란! 그를 보면 과장된 연기가 얼마나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 수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시즌 8에서 그가 떠난 자리를 무려 제임스 스페이더가 채웠지만 그조차도 스티브 카렐의 빈틈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물론 제임스 스페이더는 보스턴 리걸에서 이미 영원한 까방권을 얻었지요.)
“오피스”의 스티브 캐럴. 사진=NBC, 넷플릭스
에일렛은 위 기사에서 세 가지 실험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야 하는 훈련에서 불편함을 참고 어색한 상황을 더 견디라는 지시를 들은 그룹의 기술이 더 나아졌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불편한 경험을 글로 쓰게 하는 실험에서 감정적 불편함을 견디고 계속 글을 쓰라는 지시를 들은 이들이 감정적인 면과 글쓰기 실력에서 모두 성장한 것입니다. 세 번째 실험은 자신의 정치 성향과 다른 매체의 글을 읽게 했을 때 불편함을 참으라는 조언을 들은 이들이 새로운 정보를 수용하는 데 더 적극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위 실험은 모두 당연해 보입니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는(No pain, no gain) 말도 있지요. 하지만 문제는 제가 이 글의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감수해야 하는 불편함과 피해야 하는 불편함을 분간하는 일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운동을 할 때 어떤 고통은 이를 무시할 경우 부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바로 운동을 멈추어야 하지만, 어떤 고통은 이를 통해 근육이 성장하는 고통이므로 계속 운동을 해야 합니다. 아주 좋은 비유이지요. 적어도 몸에 대해서는 약간의 분별력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정신적 불편함에 대해서도 아마 그런 분별력이 존재할 것이고, 바로 그 분별력을 기르는 것이 제가 글의 서두에 말한 내면의 소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답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