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지난 일들을 정리하는 시기라면 연초는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에 적당한 시기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와 모두 연관된 매우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인생을 반드시 정리해야만 하는 시점을 위해 계획을 세우는 일입니다. 곧 자신의 죽음을 대비하는 일입니다.
지난 1월 2일, IT 매거진 매셔블(Mashable)에는 구글의 이메일인 지메일(Gmail) 사용자들에게 그들이 죽은 뒤 이메일 계정을 삭제하게 해두는 법을 소개한 글이 올라왔습니다. 사실 어려운 방법은 아닙니다. 구글이 제공하는 휴면계정 관리자 정보(Inactive Account Manager)에 들어가 이를 설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물론 구글이 우리의 죽음을 따로 알아낼 방법은 없습니다. 이 설정은 그저 일정한 기간, 곧 6개월이나 12개월 동안 로그인하지 않는 계정의 데이터를 스스로 삭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데이터를 삭제하기 전에 정해놓은 전화번호나 다른 이메일로 구글이 삭제 여부를 확인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이메일은 그 사람에 관한 정보를 가장 많이 담은 데이터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다른 이에게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는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인터넷에는 일본의 유명한 한 자살 명소의 자살 방지 문구로 하드디스크는 지웠는지 묻는 문구가 있다는 글이 있었습니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죽음을 앞두고도 무언가 비밀을 유지하고 싶은 인간의 마음을 잘 나타낸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꼭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자기 죽음 뒤에 이 모든 데이터가 클라우드 어딘가에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할 마땅한 이유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왠지 지구 주위를 고요히 돌고 있는 우주 쓰레기들이 연상되네요.)
물론 내가 죽은 뒤에는 그 사실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나의 권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한 번씩 외신을 통해 들려오는, 오래전 사망한 유명인의 편지가 발견되고 그 내용이 알려지는 일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되네요. 물론 연구자들이나 그 유명인에게 관심이 있었던 이들에게는 좋은 소식이겠지요.
사실 과거에는 대부분 사람에게 기록은 소중한 것이었고, 그래서 편지는 특별히 정성을 들여 보관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중고등학교 때의 편지를 얼마 전까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IT와 인터넷, 클라우드 기술이 등장해 모든 기록이 삭제하지 않는 한 그대로 남아 있게 되자, 이제 기록은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삭제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참고로, 기록을 잘 지우는 방법으로는 “해가 가기 전에 디지털 대청소를”이라는 글을 추천합니다.)
기록이 사라지지 않자 새로운 권리가 등장했습니다. 곧, ‘잊힐 권리’라는 이름의 권리입니다. 몇 년 전 뉴욕타임스에는 “잊힐 권리를 지키기 위한 10가지 방법”이라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기사의 작성자는 구글이나 페이스북의 사용을 조심하고 사용자의 데이터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애플을 쓰라고 말합니다. 쉬운 조언은 아니네요. 그 외에 공공 와이파이를 조심하라는 조언은 꽤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물질적 존재를 넘어 비트적 존재를 이야기하는 이 메타버스의 시대에, 현실에서의 죽음이 반드시 가상 세계 속 내 존재의 삭제를 동반해야 하느냐는 생각도 듭니다. 예를 들어, 적절한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하면 가상 세계 속의 나는 다른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처럼 행세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사실 죽은 이를 잊지 못해 그와 비슷한 존재를 그의 대체물로 삼는다는 내용은 과학 소설이나 과학 드라마에서 수없이 많이 사용된 설정입니다. 특히 오늘날 인공지능 기술은 충분한 데이터만 있다면 나와 비슷한 모습으로 말하는 모니터 뒤의 나를 만들 수 있고, 그 아바타가 나와 거의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말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메일이 있다면 아마 나와 비슷한, 아니 어쩌면 실제 나보다 기억력이 더 좋은 나를 만들지도 모릅니다. 수십 년 전 만났던 어떤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술술 이야기할 정도로 말이지요.
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처음에는 조심스럽던 휴면계정 삭제 설정을 당장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