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루즈 경제대학원이 지난 5월 말에 연 “공동선(common good)” 학술회의에서 나온 이야기를 전하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번엔 MIT의 아피짓 베네르지, 에스더 듀플로 교수 부부의 주장을 전한 “팬데믹과 부유세” 이야기를 소개했죠.
오늘은 2015년에 “소비와 빈곤, 복지에 관한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프린스턴 대학교의 앵거스 디튼(Angus Deaton) 교수의 주장을 전합니다. 새로운 주장은 아닙니다. 오히려 디튼 교수가 오랫동안 천착해 온 ‘절망의 죽음(deaths of despair)’에 관한 이야기로, 디튼 교수가 회의에서 한 기조연설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디튼 교수는 코로나19 팬데믹 이전부터 전혀 다른 두 개의 미국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현상으로 교육 기회에 따른 양극화의 심화와 절망의 죽음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디튼 교수는 팬데믹을 거치면서 두 개의 미국을 가르는 선이 훨씬 더 선명해졌다며, 이윤만 좇는 기업과 실패한 노동시장 제도로부터 특히 빈곤층을 보호하는 과제가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언젠가부터 대학 졸업장은 미국 사람의 직업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지표 역할을 했습니다. 대학 졸업장이 있는 사람의 직업은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의 직업보다 보수도 높고, 건강보험 등 혜택도 컸으며, 해고당할 염려도 훨씬 덜한 안정적인 직업일 가능성이 컸죠. 갈수록 이런 경향이 뚜렷해지는 가운데, 최근 들어 대학 졸업장의 유무로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 졸업장이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보다 더 건강하고, 더 오래 살고, 친구도 많으며 외롭지 않게 지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해도 대체로 맞습니다.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들은 점점 더 낮은 계급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2014~2017년 미국인의 기대수명은 3년 연속 줄었습니다. 한 세기도 더 전에 왔던 스페인 독감 팬데믹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죽음은 절망의 여정 끝에 기다리고 있는 종착역과도 같습니다. 절망의 여정이 시작되는 곳은 노동시장 제도, 특히 대학 졸업장이 없는 노동자들을 품지 못한 반쪽짜리 노동시장입니다.
보통 15~64세를 노동가능인구로 분류하죠. 이 가운데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들의 취업률은 지난 반세기 동안 급감했습니다. 경기가 좋아져서 실업률이 낮아지고, 일자리를 얻는 사람들이 잠깐 늘어나도 장기적인 추세는 변함이 없습니다. 임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 졸업장이 없는 노동자들의 임금은 수십 년째 정체돼 있습니다. 높아진 물가에 고학력 노동자들의 임금이 급증한 걸 고려하면, 실질임금은 꾸준히 줄어든 셈입니다.
좋은 일자리를 얻지 못하면 삶의 다른 영역도 고단해지기 마련입니다. 예전에 노동조합이 제 목소리를 내던 시절에는 (저학력) 노동자들의 임금이 노동조합 덕분에 어느 수준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고, 열악한 노동 조건도 개선됐으며, 노조가 친목 등 사회생활의 기반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미국에서 노조는 완전한 과거의 유물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민간 부문에선 특히 노조의 흔적도 찾기 어렵죠. 워싱턴의 로비 경쟁에서도 노조는 힘을 쓰지 못한 지 오래됐습니다. 저학력 노동자들은 결혼도 덜 합니다.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를 그나마 가족이란 울타리가 해결해주는 측면이 있었는데, 결혼보다 훨씬 더 불안정한 동거가 많아지면서 보호막도 같이 사라졌습니다.
질병에 걸리는 사람도 많아졌고, 사망률도 높아졌습니다. 생로병사가 자연의 순리라고 하지만, 노년층보다 중장년층에서 질병으로 고통받는데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은 미국의 상황은 일견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물론 이런 현상은 정확히 말하면 미국인 중에서도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절망의 죽음이란 자살, 약물 중독이나 알코올 중독에서 비롯된 죽음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앵거스 디튼과 앤 케이스(Anne Case) 교수 부부가 쓴 책 제목으로도 유명한 이 단어는 미국의 극심한 양극화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단어이기도 합니다. 절망의 죽음 가운데 절반가량이 오피오이드(opioid) 남용으로 인한 중독 때문에 일어난 죽음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심각해진 데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사람들의 목숨보다 이윤을 앞세운 제약회사에 있고, 공범은 이를 방치하거나 방조한 정치권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미국의 자살률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작동이 안 되다 못해 아예 거꾸로 일어나면서 절망을 더 심화하는 지경에 이른 것도 큰 문제입니다. 소수에게 쏠린 부와 자산이 다수의 서민, 빈곤층에게 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장 난 제도가 양극화를 더 심화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인의 기대수명이 선진국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 건 의료 제도의 실패라고밖에 볼 수 없는데, 미국인들은 선진국 평균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의료비를 부담합니다. 빈곤층은 제대로 된 치료도 못 받으면서 병원비나 약값 때문에 파산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와중에 병원과 제약회사 경영진은 실패한 노동시장 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역대 최대 규모의 급여, 보너스 잔치를 계속 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이 덮쳤습니다. 노동시장의 불평등이 당장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고학력 전문직과 사무직 노동자들은 대부분 어렵잖게 재택근무로 바꿔 일을 계속했습니다. 저학력 노동자들의 선택지는 전혀 달랐습니다. 재택근무가 어려운 현장 노동이 많다 보니, 그나마 일자리가 사라지지 않아 다행인 경우에도 코로나19에 걸릴 위험을 무릅쓰고 출근해야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자녀 양육이나 가사의 부담을 더 많이 지는 여성들이 먼저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다행히 정부가 급히 마련한 재난지원금을 쏟아부어 식료품 등 생필품 생산을 이어갔고, 저소득층에도 지원금을 댔습니다. 소득 불평등은 일시적으로 줄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저소득층 가정의 아이들에게 주로 발생할 교육 격차 문제는 걱정됩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초저금리 때문에 갈수록 심해지는 부의 불평등 문제도 생각해야 합니다. 미국 억만장자들의 자산은 팬데믹을 거치며 1조 달러 이상 늘어났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미국 주식시장이 전례 없는 호황을 이어가는 원인도 여기 있습니다. 고학력, 고소득 전문직 노동자들에게 지난 10년은 자산이 알아서 쑥쑥 불어나는 살맛 나는 시절이었는데, 팬데믹과 함께 자산이 심지어 더 빨리 불어났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집에서 줌(Zoom)을 비롯한 온라인 업무 툴을 이용해 코로나19 걱정 없이 안전하게 일했습니다. 그런 고상한 선택지 따위는 애초에 없던 저소득층, 저학력 노동자들은 팬데믹의 위험에 그대로 노출됐고, 지금까지 75만 명 이상이 코로나19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팬데믹을 거치며 정부 적자가 대개 늘어났습니다. 이를 어떻게 메워야 할까요? 여러 선진국 정부와 IMF가 일시적으로 부유세를 걷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증세에 대한 정치적인 저항도 있을 테고, 실제로 세금을 정확히 징수하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양극화가 극심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세금을 더 걷는 데 합의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의 통합은 요원해 보입니다.
물론 세금을 공정하게 매기고 정확히 걷는 게 중요합니다. 기업들에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세금을 거둬야 하고, 조세회피처로 숨지 못하도록 국제 규약도 강화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노동자들이 기업에 너무 많이 빼앗긴 권력을 되찾아오는 것도 중요합니다. 노조를 적대시하는 기업의 정책에 징계를 가해야 하고, 반독점 규제도 더 강력히 집행해야 합니다. 기업 변호사 출신 판사가 이미 너무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의료보험을 민간이 아니라 공공 부문에서 일차적으로 책임지는 전국민 의료보험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극도로 비효율적인 의료에 너무 많은 돈을 쓰는, 그래서 부의 양극화를 끝없이 부추기는 미국의 고질병을 절대 고칠 수 없습니다. 바이든 행정부는 유럽의 복지국가에 가까운 모습으로 미국을 바꾸는 개혁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 드는 재원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다면 개혁은 구호에 그칠 수도 있습니다.
*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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