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뉴욕시 배달 노동자 보호법안 통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건 원래 사회적 안전망의 보호를 받지 못하던 취약 계층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미국에선 플랫폼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배달 노동자들은 기존의 저임금, 열악한 노동 조건에 바이러스에 감염될 위험까지 떠안은 채 밀려드는 주문을 처리해야 했죠. 지난해 뉴욕시 의회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배달 노동자 보호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9월 29일에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쓴 글입니다.


 

지난해 4월 뉴욕시는 미국 내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타격을 가장 크게 입은 도시였습니다. 전 세계로 범주를 넓혀도 아마 가장 피해가 컸던 지역이었을 겁니다. 매일 확진자가 수천 명씩 나왔고, 도시는 순식간에 얼어붙었습니다. 교외에 별장이 있거나 맨해튼 집을 비우고 한적한 지역에 있는 거처를 빌릴 여력이 있는 부자들은 도시를 떠났지만, 그럴 수 없던 많은 사람은 도시에 남아 외출을 최소화하며 숨죽여 지냈습니다.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려는 사람들이 없다 보니, 식당 대부분은 문을 닫거나 배달 또는 포장 주문만 받기 시작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음식 배달 서비스는 급격히 성장했습니다. 벌써 1년 반 가까이 음식 배달 서비스는 뉴욕 시민들의 삼시세끼의 적잖은 부분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음식 배달 서비스 중 하나인 심리스(Seamless)의 뉴욕 광고 문구는 “Seamless: How New York Eats”입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뉴욕에서 밥은 배달해 먹는 게 ‘국룰'” 정도가 되겠죠. 원래 밀집된 도시의 아파트보다 이웃과 거리를 두고 떨어진 근교의 주택에 사는 사람이 더 많은 미국에서 뉴욕은 배달 서비스 수요가 높은 곳이었습니다. 미국 전체로 보면 미국인을 ‘배달의 민족’이라고 부를 수 없겠지만, 뉴요커들 만큼은 ‘배달의 시민’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입니다.

뉴욕 거리에서는 자동차와 자전거 사이를 주로 전동 자전거를 타고 바삐 달려가는 배달 노동자들이 이미 익숙한 풍경이 됐습니다. 심지어 지난달 말 허리케인 아이다의 잔재가 뉴욕과 뉴저지 일대에 폭우를 뿌렸을 때 발목 이상 물이 찼는데도 손님의 음식을 싣고 도로를 달리는 배달 노동자들의 모습이 이슈가 되기도 했죠. 현재 뉴욕시에서 일하는 배달 노동자는 8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대다수 노동자는 열악한 노동 조건과 저임금, 위험천만한 노동 환경을 감내하며 생계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지난 23일, 뉴욕시 의회가 마침내 배달 노동자를 보호, 지원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빌 드블라지오 시장도 법안을 지지하고 있는 만큼 이번 법안은 곧 발효될 것으로 보입니다. 심리스나 그럽허브(Grubhub), 도어대시(DoorDash), 우버이츠(Uber Eats) 등 플랫폼에서 소비자들의 음식 주문이 들어오면 이를 배달하는 노동자들의 삶에 새로운 법안이 미칠 영향을 정리했습니다.

앱 기반 음식 배달 노동자 5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42%가 배달비를 덜 받거나 아예 못 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배달 중에 크고 작은 교통사고를 당한 노동자도 절반 가까이 됐고, 의료비를 지원받지 못해 아프면 자기 돈으로 치료받는다고 답한 노동자도 75%나 됐습니다. 배달 중에 강도를 당한 노동자는 54%, 강도에게 폭행을 당한 노동자는 30%나 됐습니다.

지난달 폭우로 도로가 물에 잠겼을 때 뉴욕 거리에서 음식을 배달하고 있는 노동자의 모습이 영상에 찍혔다. 출처=CBS뉴스 갈무리

법안에 따라 음식 배달 앱이나 서비스는 앞으로 배달 노동자들에게 수수료를 받을 수 없습니다. 또 팁을 어떻게 배분해 배달 노동자와 레스토랑, 플랫폼이 나눠 가지는지 공개해야 하고, 배달에 필요한 보온 가방 값을 노동자에게 물릴 수도 없습니다. 그동안 배달 노동자들에게 화장실을 쓰지 못하게 하는 식당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마땅치 않아 곤욕을 치르는 배달 노동자들이 많았죠. 이번 법은 식당들이 배달 노동자의 화장실 이용을 막아선 안 된다고 명시했습니다.

또한, 이번 법에 따라 배달 노동자들은 하기 싫은 배달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되며, 배달 앱은 배달을 거부한 노동자에게 불이익을 줄 수 없습니다. 그동안 음식이나 현금, 배달할 때 타고 다니는 전동 자전거를 빼앗으려는 강도들의 위협에 노출됐던 노동자들은 식당 반경 몇 km까지만 배달하겠다, 혹은 다리 건너 어느 지역은 가지 않겠다는 식으로 배달 관련 조건을 스스로 정할 수 있게 됩니다.

뉴욕시 의회의 코리 존슨 의장은 이번 법안이 노동자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배달 음식 수요가 폭증하면서 엄청난 이익을 거둔 배달 앱 서비스 기업들이 이런 심각한 문제를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뉴욕에 이어 다른 대도시들도 배달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법안을 만드는 과정부터 의회와 긴밀히 협의한 뉴욕 배달 노동자 연맹(Los Deliveristas Unidos, 비슷한 노조가 여러 개 있는데, 배달 노동자 가운데 상당수가 라티노 노동자라서 이 노조 이름은 아예 스페인어)은 법안이 통과된 걸 환영하면서도 이번 법안은 수많은 뉴요커들이 즐기는 배달 음식 이면에 있는 배달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알리는 첫걸음일 뿐이라고 강조합니다. 노동자들이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면서 일하거나 최저임금도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객이 주는 팁에 수익의 상당 부분을 의존해야 하고, 궂은 날씨나 강도의 위험을 무릅쓰고 배달을 나가지 않으면 다음번 배달 호출에서 배제되는 등 불이익을 당하는 상황은 노동자의 기본권이 심각하게 침해된 상황입니다.

노동자들이 처한 문제를 명시한 건 주목할 만하지만, 특히 배달 앱이 노동자를 고용할 의무에 관해서는 법에 아무런 언급이 없던 점을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큽니다. 현재 배달 노동자들은 배달 앱이 고용한 노동자가 아닌 개인사업자 자격으로 고객과 배달 노동자를 이어주는 플랫폼에 등록한 개인사업자로 분류됩니다. 배달 앱들은 주와 연방의 노동법이 고용주에게 부과한 의무를 면제받죠. 전체 GDP의 1/6이 건강보험에 쓰일 만큼 비효율적인 미국 의료 시장에서 노동자들의 건강보험료는 고용주가 대신 내줍니다.

노동자를 고용한 게 아니라 호출이 올 때마다 노동자를 고객과 연결만 해주는 플랫폼의 지위를 인정받는 데 우버 같은 회사들이 사운을 걸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드는 비용의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다르기 때문이죠. 실제로 지난해 선거에서 캘리포니아주는 우버나 리프트 등 플랫폼에서 일하는 기사를 노동자로 볼 것인지 아닌지를 주민투표에 부쳤는데, 60% 가까운 유권자가 이들을 노동자가 아닌 개인사업자로 봐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배달 노동자들의 처우에 관한 법이 제정되기에 앞서 이미 배달 앱과 식당들 사이에 수수료 문제를 두고 마찰이 있었고, 이와 관련한 소송은 이미 진행 중입니다. 식당들은 가뜩이나 마진이 크지 않은 상황에서 일부 배달 앱은 식당에 수수료를 최대 30%까지 요구하고 있다며 불만이 많습니다. 이에 뉴욕시는 배달 앱이 식당에 부과할 수 있는 수수료 상한선을 최대 15%로 정했는데, 그러자 배달 앱들이 소비자에게 비용이 전가될 수 있다며 소송을 시작한 겁니다.

배달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이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데 관한 이번 법률에 대해서는 배달 앱들도 기본적으로 환영하며, 최대한 협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노동자들이 배달 지역을 직접 설정하게 되면 가뜩이나 배달 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려운 우범 지역, 소외 지역 주민들은 서비스에서 더 배제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또한, 노동자들이 화장실을 쓰는 문제도 노동자의 기본권에 해당하는 문제인 만큼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시 정부나 배달 앱이 레스토랑에 화장실을 개방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지는 법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미국의 연방 최저임금은 물가 인상률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채 정체돼 있습니다. 주별로, 도시별로 노동 소득만으로 생활할 수 있는 생활 임금(living wage)을 최저임금으로 정한 곳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여전히 많습니다. 터무니없이 낮은 최저임금마저 보장되지 않는 직군이 몇 개 있는데, 대표적인 게 식당에서 일하는 서버들입니다. 이들은 수입의 대부분을 팁에 의존합니다. 팁 문화가 없는 나라에서 온 손님이 팁을 내지 않으면 서버들이 때로 화를 내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그냥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계가 위태로워지는 거죠.

배달 노동자들도 별다른 규제가 없는 상황에서 그동안 얼마 되지 않는 벌이에서 일정 부분을 수수료로 앱에 떼이고, 나머지는 음식을 주문한 손님이 주는 팁에 의존해 왔습니다. 식당에서는 보통 음식값의 15~20%를 팁으로 내는데, 저는 배달 음식을 시킬 때 배달 노동자를 식당의 서버라고 생각해서 그 정도 금액을 팁으로 냅니다. 그러나 팁이 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다분히 관습에 기댄 문화인데,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건 오랜 관습이 아니다 보니 고객들이 주는 팁도 천차만별이고, 그만큼 배달 노동자들의 수입도 들쭉날쭉했던 겁니다.

뉴욕시 의회가 제정한 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그래도 뉴욕에서만 8만 명 넘는 배달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부각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은 또 배달 노동자들이 받아야 할 적정 임금을 계산하는 데 필요한 데이터를 모으기 위해 뉴욕시가 별도의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

미국보다는 나은 최저임금 제도가 있다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사람의 노동이 훨씬 더 싼값에 소비됩니다. 자정 전에 물건을 주문해도 다음 날 새벽이면 택배가 집앞에 와 있고, 아무리 지저분했던 거리도 아침이면 깨끗이 청소돼 있죠. 음식 배달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식값에 배달료도 포함돼 있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보니, 소비자는 당연히 배달료가 없거나 싼 집에서 주문하려 하고, 업주들도, 배달 서비스 앱도 배달료를 내리려는 가격 경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배달 노동자들의 노동은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하는 노동에 속합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플랫폼 노동자들의 처우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면 좋겠습니다.

ingppoo

뉴스페퍼민트에서 주로 세계, 스포츠 관련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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