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9월 9일 한층 강화된 코로나19 백신 접종 의무화 방침을 발표했습니다. 미국 노동부 산업안전보건국(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Administration)이 발표한 방침을 보면, 100인 이상 노동자를 고용하는 민간 기업은 직원들에게 백신을 맞거나 매주 코로나19 검사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미국 정부는 또 연방정부 부처나 산하 기관에서 일하는 연방 공무원, 병원이나 요양원 등 의료 시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코로나19 백신을 의무적으로 맞게 할 방침입니다.
이번에 발표한 방침을 종합해보면, 총 1억 명에 가까운 미국인이 백신을 의무적으로 맞아야 하는 대상에 포함됩니다. 물론 이 가운데 이미 백신을 맞은 사람도 많겠지만, 백신 접종률이 좀처럼 오르지 않는 상황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더 늦기 전에 칼을 빼든 겁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실제로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고 말하며, 국민들에게 백신을 맞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2021년 9월 현재 미국의 백신 접종률은 54%, 한 차례라도 백신을 맞은 사람은 63%로, 여름 이후 접종률이 더디게 오르고 있습니다. (2022년 2월 현재 두 수치는 각각 64%, 75%.) 백신을 안 맞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살펴본 글을 쓴 한 달 전보다 별로 나아진 게 없습니다. 8월 말에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화이자와 바이오엔테크의 코로나19 백신을 정식 승인했지만, 여전히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거부하거나 아직 맞지 않고 있는 미국인이 8천만 명이나 됩니다. 그러는 사이 델타 변이 바이러스가 백신 접종률이 낮은 지역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 지역 의료 체계를 붕괴시키는 등 상황은 계속 나빠졌습니다. 9월 들어 미국에서는 매일 코로나19 확진자가 15만 명씩 새로 나오고, 사망자도 1천 명이 넘습니다. (누적 확진자는 4천만 명이 넘었고, 사망자도 66만 명에 이릅니다. 사망자는 최근 90만 명을 넘었습니다.)
바이든 행정부의 발표에 야당인 공화당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특히 보수적인 주들의 현직 주지사들은 백신 의무 접종을 압제에 빚대는 등 맹비난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미국 기업들에 직원들의 백신 접종을 강제하도록 명령할 권한이 없다. 백신은 물론 생명을 구할 수 있지만, 그 백신을 강제로 맞추려는 건 헌법에 위배되는 끔찍한 발상이다. 미국은 자유의 나라다. 그 자유란 독재자의 압제로부터의 자유다. 테이트 리브스 미시시피 주지사 트윗
사실 공화당 내에서도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의견은 오랫동안 과학적 근거가 없는 소수의 위험한 주장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에 맞설 수 있는 카드라면 뭐든 환영받는 상황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이 취해 온 과학의 정치화가 또 한 번 승리를 거두고 당내 주류에 편입한 겁니다.
특히 정부가 민간 기업에 백신 접종을 의무화하도록 강력히 권고한 지점이 공화당 주지사들의 분노를 산 것으로 보입니다. 공화당 주지사들은 “연방 정부의 폭거”, “지옥문이 열렸다”는 식의 거친 표현을 동원해 가며, 미국인의 자유와 헌법이 보장한 주 정부의 권한을 지키기 위해 연방 정부와 법정에서 다투겠다고 밝혔습니다.
미국 수정헌법 10조는 헌법에 명시하지 않은 권한이 연방 정부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주 정부에 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백신 접종을 비롯한 보건, 방역에 관한 결정도 궁극적인 권한은 대통령이 아니라 각 주의 의회와 주지사가 내리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공화당 주지사들이 있는 주들 대부분은 오래전부터 홍역, 볼거리 등 다른 전염병에 대한 백신은 의무적으로 맞아야 했습니다. 다른 질병과의 형평성만 생각해 보더라도 공화당 주지사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또한, 바이든 대통령이 발표한 방침은 미국인들 전부를 대상으로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의무화한 게 아닙니다. 대통령이 직접 명령할 수 있는 연방 정부 기관 소속 공무원에게, 또 보건법이 연방 정부의 권한으로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백신 접종을 권고하는 기준을 세운 겁니다. 그러다 보니 공화당 주지사들의 반발은 정치적인 구호로는 유용할지 모르지만, 절차의 정당성을 따지게 될 법원에선 효력이 크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백신 자체를 반대하고 거부하다가 안티백서(anti-vaxxer) 꼬리표를 달게 되는 건 정치인이라면 누구도 바라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공화당의 미치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는 올해 들어 백신을 접종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했고, 심지어 트럼프 전 대통령도 유세 중에 백신을 맞으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배신감을 느낀 지지자들의 야유를 받았지만요.)
연방 정부나 민간 기업들의 백신 접종 의무화 지침을 보면, 종교적인 이유로 백신을 맞지 못할 경우 예외를 인정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뉴욕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백신 접종을 거부하거나 백신을 맞지 않고 있는 8천만 명 가운데 이 조항에 기대어 예외를 인정받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조항이 붙게 된 법적 근거를 따져 보면, 1964년 제정된 민권법에 이르게 됩니다. 흔히 인종차별을 금지한 법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민권법은 인종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차별을 금지하고 차별로 인한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만든 법으로, 법이 다루고 있는 차별 가운데는 종교나 개인의 신념에 대한 차별도 있습니다. 노동자가 직장의 근무 환경이나 노동 조건이 요구하는 기준을 개인의 신념이나 종교적인 이유로 충족하지 못할 때 고용주가 이를 참작해 노동자가 차별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민권법은 적시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많은 사람에게 잘 알려진 종교가 아니라 새로 생겨난 종교나 논리적이지 않아 보이는 주장을 담은 신념이라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대신 사회적인, 정치적인 믿음은 종교적인 신념과 구분돼야 합니다.
사회적인, 정치적인 견해와 종교적인 신념은 사안에 따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19 백신을 맞지 않으려는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지난 2016년에 버몬트주는 비종교적인, 즉 개인적인 신념에 따라 백신을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을 삭제했습니다. 전에는 어떤 이유에서든 백신을 맞기 싫으면 안 맞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된 겁니다. 그러자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이 중 백신을 맞지 않은 어린이들 사이에서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백신을 안 맞았다는 어린이의 비율이 0.5%에서 3.7%로 급증했습니다. 전에는 다른 이유로 백신을 안 맞추던 부모들이 이제는 댈 수 있는 근거가 종교적인 신념밖에 없게 되자 그렇게 했다고 추정할 수 있죠.
이미 미국의 주요 기업들 가운데는 직원들의 백신 접종을 의무화한 곳이 많습니다.
ESPN에서 10년 가까이 대학 미식축구, 대학 농구 현장을 취재해 온 리포터 앨리슨 윌리엄스는 회사가 정한 백신 접종 기한인 9월 30일이 다가오는 시점에 백신을 맞지 않기로 했다며 사직서를 냈습니다. ESPN의 모회사인 디즈니가 정한 백신 의무 접종 기한이 9월 30일이고, ESPN은 앞서 현장을 취재하는 기자와 스태프들에게 8월 1일까지 코로나19 백신을 맞으라고 권고한 바 있습니다. 유나이티드 항공사는 8일 종교적인 이유로 코로나19 백신을 맞을 수 없다고 한 직원들에게 직무 대기 조치를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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