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이 2020년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을 임명하면서 미국 대법원은 보수 6 대 진보 3의 구도로 재편됐습니다. 보수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대법원이 올해 뒤집을 것으로 예상되는 판결 중 하나가 여성이 임신을 중절할 권리를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결입니다. 그에 관해서 프리미엄 콘텐츠에도 글을 여러 편 썼는데, 가장 먼저 쓴 글은 지난해 9월 6일에 쓴 텍사스주가 제정한 낙태금지법 이야기입니다.
태아의 심장 박동이 감지되기 시작하는 임신 6주 이후의 낙태를 사실상 전면 금지한 미국 텍사스주의 낙태금지법이 지난 1일 예고한 대로 발효됐습니다. 미국 대법원은 법의 시행을 막아달라며 낙태 클리닉과 시민단체가 제출한 긴급 청원을 기각했습니다.
임신 중절 여부를 선택할 권리는 아이를 밴 여성에게 있으며, 임신부의 선택을 정부가 강제하거나 제약할 수 없다고 명시한 대법원의 로(Roe) 대 웨이드(Wade) 판결이 나온 게 지난 1973년의 일입니다. 이후 공화당과 종교 단체를 비롯한 보수 세력은 줄기차게 낙태를 금지하거나 제약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텍사스주의 새 낙태금지법은 보수 진영에는 지난 반세기에 걸친 노력이 결실을 볼 수 있는 획기적인 법입니다. 반대로 진보 진영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동안은 1992년에 있었던 가족계획연맹(Planned Parenthood) 대 케이시(Casey) 판결에 따라 아이가 태어났을 때 스스로 연명할 수 있는 시기로 간주하는 임신 22~24주가 낙태를 허용하는 기준이었습니다. 24주 이후의 낙태는 아이는 물론 산모도 위험할 우려가 크기 때문에 대체로 금지돼 있거나 엄격한 제약이 따릅니다. 하지만 그전에는 임신부가 임신을 중단하기로 할 때 국가가 과도하게 개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준이 텍사스 낙태금지법과 함께 임신 6주로 앞당겨진 겁니다. 임신 6주에는 임신 사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텍사스주는 어떻게 법과 다름없는 대법원 판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법안을 제정할 수 있던 걸까요? 여기에는 보수가 절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법원의 대법관 구도도 한몫했지만, 기존의 낙태 금지 시도와 달리 새로운 전략을 반영한 법조문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텍사스주 낙태금지법의 디테일을 찬찬히 뜯어보면, 보수 진영은 진보 진영이 그동안 써온 전략을 훌륭히 벤치마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텍사스주의 법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미국 대법원과 대법관의 구성을 잠깐 생각해 봅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했지만, 4년 임기 동안 무려 3명의 대법관을 지명했고, 지명한 대법관은 모두 논란 끝에 의회의 비준을 받았습니다. 특히 지난해 (진보 성향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사망하며 생긴 공백을 (보수 성향인)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으로 메우면서 대법원은 보수 6대 진보 3의 구도로 재편됩니다.
특히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여성의 임신 중절을 금지하거나 제약하는 판결을 여러 차례 내린 코니 배럿 판사가 대법관이 되면서 6:3의 구도가 확립되자, 가족계획연맹을 비롯한 시민단체들은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엎는 건 시간 문제라며 우려했습니다. 반대로 대법원은 어디까지나 헌법을 해석하고 법을 제정, 집행한 절차가 적법했느냐를 따지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고 의사결정 과정이 느릴 수밖에 없는 기관이므로, 벌써 반세기 가까이 이어지며 자리를 잡은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대법원이 앞장서서 번복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공화당이 다수인 텍사스주 의회와 그렉 애봇 주지사가 효과적으로 공략한 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즉, 지난 5월에 애봇 주지사가 서명했고, 지난 1일 발효된 낙태금지법은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비롯해 여성의 낙태를 국가가 금지하고 제약해선 안 된다는 미국의 현행법을 실질적으로 어긴 법입니다. 그러나 이 법 자체에 관한 소송이 벌어져 지방법원, 항소법원을 거쳐 대법원까지 가려면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립니다. 앞서 말했듯이 대법원이 판결을 내리는 과정은 빠르지 않으니까요. 또 매년 7천여 건의 사건이 대법원에 접수되지만, 이 가운데 대법원이 판결을 내리는 사건은 100여 건에 불과합니다.
텍사스주의 법은 헌법이 보장한 여성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충격적인 법이다. 이런 법을 막지 않고 있다니, 다수 의견에 선 대법관들은 지금 모래에 머리를 처박고 있다. (The majority of the courts are burying their heads in the sand.) – 소토마요르 대법관
우리말로는 ‘눈 가리고 아웅’ 한다는 표현과 비슷합니다.
보수 진영은 오랫동안 낙태를 금지하거나 최소한 국가가 개입할 수 있는 주 수를 앞당기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임신 중절 권리를 제약하는 법은 그 자체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어기는 셈이 돼 연방법원에서 효력이 취소되곤 했습니다. 주 의회를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어 법이 통과되더라도 거기까지였던 겁니다. 그렇다면 왜 연방 법원은 텍사스주가 제정한 이번 낙태금지법을 막지 못했을까요? 법조문을 자세히 뜯어보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텍사스 낙태금지법에는 임신 중절을 못 하게 하는 주체가 명시돼 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낙태금지법들은 주지사나 주 법무부장관 등 임신 몇 주 이후의 낙태를 금지하는 주체를 명시했습니다. 명시된 주체는 곧바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비롯해 연방법, 나아가 헌법을 어긴 주체로 특정돼 소송 대상이 됐죠. 그러면 연방 법원이 나서서 법을 무효로 한 겁니다.
그런데 텍사스 낙태금지법은 임신 중절을 금지하는 주체가 주지사나 법무부장관이 아니라고 오히려 명확히 제외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직접 낙태를 못 하게 막는 법을 집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송 대상이 될 수도 없는 거죠. 그렇다면 누가 낙태를 막죠? 텍사스주 의회는 그 권한을 주 정부를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위임(deputize)했습니다. 누구나 임신 6주 이후에 낙태하려는 사람, 임신 중절 수술을 해주는 클리닉 등 낙태에 도움을 주는 사람을 찾아 신고하면 포상금을 주겠다고 한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정부가 직접 포상금을 주는 건 아니고, 낙태를 시도하는 사람이나 임신 중절 수술을 하는 클리닉 등 낙태금지법을 위반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나 이들에게 민사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소송에서 이기면 최소 1만 달러의 배상금과 소송 비용을 받을 수 있게 했습니다. (피고는 재판에서 이기더라도 소송 비용을 원고에게 청구할 수 없습니다.) 임신 중절을 돕는 사람의 범주도 매우 넓은데, 낙태 클리닉을 소개해주거나 클리닉까지 우버를 타고 갈 때 우버 기사도 피고가 될 수 있습니다.
법의 목적은 명확합니다. 임신 중절에 관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막대한 비용 부담을 질 수 있다는 공포를 심어(terrorize) 낙태를 막겠다는 거죠. 법이 발효된 뒤 실제로 텍사스주에서는 임신 중절 수술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낙태 클리닉과 시민단체들은 법이 위헌이라며 연방 법원에 소를 제기했지만 잇따라 기각됐습니다. 주지사나 주 법무장관이 법을 집행하지 않는다고 명시됐기 때문에 이들에게 소를 제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거죠. 이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대법원에 긴급 청원을 제기하는 것밖에 없었고, 그 결과는 앞서 설명한 대로입니다.
텍사스 낙태금지법이 성공을 거두면서 공화당이 주 의회 다수당인 다른 주들에서도 비슷한 법이 잇달아 제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진보 진영에는 악몽의 시작이 될지도 모르죠. 흥미로운 건 정부가 직접 나서서 법을 집행하는 주체가 되는 대신 특정하기 어려운 개인들에게 법을 집행할 권한을 위임한 보수 진영의 전략이 실은 진보 진영에서 오랫동안 써온 전략이라는 점입니다.
덴버대학교 조슈아 윌슨 교수가 워싱턴포스트 멍키 케이지에 한 분석을 보면, 특히 인종 차별을 금지한 민권법(civil rights laws)을 정착시키는 데 진보 진영은 개인 차원에서 줄기차게 소송을 제기하는 전략을 세워 효과적으로 활용했습니다. 당시 보수 진영은 민권법을 어겼다며 소송을 제기할 유색인종이나 여성 등 소수자들이 소송 비용을 마련하기 어려워할 거로 생각했지만, 오히려 진보 성향의 젊은 인권 변호사들이 인종 차별 사례들을 적극적으로 모아 소송을 대리하고 나서면서 민권법은 꾸준히 판례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경험을 쌓고 성장한 대표적인 법조인이 고 긴즈버그 대법관일 겁니다.
법조계가 진보 성향 일색으로 바뀌는 데 두려움을 느낀 보수 진영은 1980년대부터 보수적인 변호사, 법조인을 양성하려는 장기적인 전략을 세우고 로스쿨을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노력이 낳은 대표적인 법조인이 코니 배럿 대법관입니다. 텍사스주 낙태금지법을 고안하고 제정하는 데는 이런 보수적인 로스쿨 출신의 변호사들이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임신 중절 권리를 옹호하는 시민단체들은 텍사스주의 낙태금지법을 무너뜨리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할 겁니다. 먼저 대법원에 긴급 청원이 올라갔던 사안이 여전히 연방 항소법원에 계류 중이므로, 해당 판결이 나면 이 문제를 법원에서 다툴 수 있습니다. 또한, 텍사스주의 낙태 클리닉이 소송당할 것을 각오하고 임신 중절 수술을 해줄 수 있습니다. 그럼 보수 단체들이 해당 클리닉을 고발할 테고, 법정 공방이 시작되겠죠.
다만 아직은 소송 비용을 감수하고 용기 있게 나선 클리닉이 없습니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임신 중절에 반대하는 이들의 끊임없는 시위, 비난, 협박을 견디는 일도 텍사스 등 보수적인 주에 있는 클리닉들에는 힘겨운 과제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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