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미국 정치 최대 화두 “비판적 인종 이론”

2021년 미국 문화 전쟁의 핵심 키워드 가운데 하나였던 비판적 인종 이론은 이 글의 마지막에 쓴 것처럼 올해 말 중간선거와 2024년 대선 정국에서 인종 문제가 미국 정치에서 어떤 식으로 쟁점화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입니다.


1970년대, 학계의 비주류였던 일부 흑인 법학자들의 논의에서 유래된 학술용어 “비판적 인종 이론(CRT, critical race theory)”이 미국 사회의 뜨거운 키워드로 부상했습니다. 한국 언론도 올 들어 CRT를 정면 비판한 플로리다 주지사의 트윗, ‘인종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교육’에 대한 한 중학교 교사의 위헌 소송 제기 등을 조명하며 미국 사회의 논쟁을 소개했습니다.

비판적 인종 이론은 한 사회에서 인종과 인종차별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파악하기 위한 하나의 분석 틀로, 인종차별이 단순히 개개인의 편견과 신념을 넘어서는 구조적, 제도적인 문제라는 주장입니다.

1950, 60년대 민권운동을 통해 민권법이 제정되었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이 해소되지 않고 유색인종에게 불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이 견고하게 유지된 이유는 미국 사회의 법과 제도, 정책에 인종차별이 단단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비판적 인종 이론은 데릭 벨, 킴벌리 크렌쇼, 패트리샤 윌리엄스와 같은 대표 주자들이 제시한 몇 가지 큰 틀을 기반으로 법학 분야를 넘어 다양한 학문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지만, 여전히 유동적이고 내부적으로도 논쟁이 활발한 이론이라고 이코노미스트는 설명합니다.

비판적 인종 이론의 역사는 흑인 민권운동의 역사 만큼 깁니다. 사진=Unsplash

 

다소 생소한 상아탑의 용어가 미국 정치 전면에 등장하게 된 현 사태의 발단으로 미국 언론은 보수계열 싱크탱크 맨해튼 인스티튜트의 선임연구원 크리스토퍼 루포라는 인물을 지목합니다. 2020년 여름, 루포는 시애틀시 당국이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내재화된 인종적 우월성”에 대한 교육을 강제하고 있다는 “내부 고발”을 받았다며, 모든 것을 인종의 틀로만 바라보고, 피부색의 차이를 선과 악에 비유하는 위험한 정체성 정치가 미국 전체로 퍼져나갈 것을 우려하는 내용의 글을 연구소의 출간물에 실었습니다.

이후 미국 각지의 학교와 정부 기관에서 비슷한 내용의 “내부 고발”이 이어졌습니다. 루포는 이어 폭스뉴스 채널의 인기 프로그램 “터커 칼슨 투나잇”에 출연해 CRT가 연방정부 내에서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행사해 미국을 위협하는 무기가 되고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그와 같은 내용의 연수 프로그램을 금지해달라고 요청했죠. 그로부터 3주 후, 트럼프 대통령은 연방정부의 다양성 교육에서 CRT를 배제한다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하게 됩니다.

폭스뉴스 터커 칼슨 투나잇에 출연한 크리스토퍼 루포(오른쪽).

 

이 명령은 곧장 연방 법원에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판결을 받았고, 조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즉시 해당 명령을 취소했습니다. 이러한 대응에도 공화당과 보수주의자들은 주 의회와 지역 교육위원회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반(反) CRT 입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반(反) CRT 입법을 찬성하는 측에서는 이 이론이 인종 간 갈등과 분열을 부추기고,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죄책감을 느끼도록 강요하며, 미국이라는 나라를 증오하도록 가르친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걸 백인 탓으로 돌리는 주장이 오히려 인종차별적인 이론이고, 결과의 평등을 추구하니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라는 비난도 심심찮게 터져 나옵니다.

반면 반(反) CRT 입법에 우려를 표하는 측에서는 특정 시각이나 이론을 소개하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위헌이라고 반박합니다. 또 이런 법이 통과됐을 때 교육 현장에서 발생할 어려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실제로 논의되는 법안의 문구들을 살펴보면 “인종이나 성별, 정치 성향에 따른 집단 간의 분열을 부추기는 내용”, “미국이라는 나라가 근본적으로 인종차별적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내용”, “학생들이 인종이나 성별, 종교에 대해 특정한 시각을 갖도록 하는 내용”을 금지한다는 문구들이 있는데, 그 자체로도 애매하지만 해석하기에 따라 매우 광범위하게 적용될 소지가 있습니다.

대부분 시민이 정확한 뜻도 알지 못하는 개념을 놓고 싸움을 부추기는 것이 내년 중간선거를 앞둔 공화당의 정치 전략이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애틀랜틱은 5월 7일 기사를 통해 그 흐름을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1990년대 초반, 빌 클린턴 대통령이 래니 귀니어라는 진보 성향의 로스쿨 교수를 법무부 차관으로 지명했을 때도 공화당은 후보자가 “CRT라는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인물”이라며, “인종이나 성별 할당제의 여왕” 같은 꼬리표를 달아 공격했고, 결국 지명이 철회된 바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을 앞두고 있던 2012년, CRT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릭 벨 교수가 사망하자 인터넷에서는 오바마와 벨 교수가 만나 포옹하는 영상이 퍼지기 시작했고, 폭스뉴스는 이를 대통령이 급진주의자를 가까이하는 증거라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하버드 로스쿨 학생들이 발행하는 법학 평론지 하버드 로리뷰의 편집장이던 28살 버락 오바마가 데릭 벨 교수를 연설에 앞서 소개한 뒤 포옹하는 장면. 사진=WGBH 아카이브 영상 갈무리

이후 10년 가까이 CRT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폭스뉴스가 다시 이 단어를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이후 흑인에 대한 경찰 폭력과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때와 맞물립니다. 2020년 6월 5일 이후 폭스뉴스는 무려 150회의 방송에서 CRT라는 단어를 언급했죠.

올여름 내내 폭스뉴스는 CRT를 비난하는 뉴스를 내보냈습니다. 터커 칼슨은 독립기념일에도 CRT에 반대하는 학부모를 인터뷰했습니다. 화면 아래 자막은 “일선 학교에서 벌어지는 세뇌 교육과 맞서 싸우는 엄마들”입니다. 사진=터커 칼슨 투나잇 갈무리

 

NPR이 인터뷰한 국립교육아카데미의 글로리아 랫슨-빌링스 회장도 선거에서 CRT 논란을 정책으로 승부하지 못하는 세력이 문화전쟁을 부추기려는 시도로 본다며, 반(反) CRT 입법 시도가 일어나는 지역이 유권자들의 투표 참여를 방해하는 법과 제도가 존재하는 지역과 일치한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역사의 어두운 부분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는 어느 사회에서나 큰 쟁점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의견이 크게 갈리는 부분입니다. 교육, 특히 역사 교육의 방향이 정치 이슈화되고, 나아가 국가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도 우리에겐 낯설지 않습니다. 박근혜 정부 때의 국정교과서 논란이나, 이른바 “자학사관”을 비판한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전교조가 특정 이념을 학생들에게 주입한다는 유구한 비판,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까지 진출한 “페미니즘 세뇌 교육 집단” 수사 요청 등과도 겹쳐 보이는 지점이 있습니다.

반(反) CRT 입법을 미국 사회 분열을 우려하는 보수주의자들의 진심 어린 충정으로만, 또 반대로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한 정치적 책략으로만 단정 짓기는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러한 움직임이 유력한 선거 전략이 될 만큼 차별의 역사와 구조적 차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거부감을 느끼는 미국인이 많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2022년 중간선거와 2024년 대선 정국에서 CRT는 인종 문제가 미국 정치에서 어떤 식으로 쟁점화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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