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정치

제리맨더링: 1인 1표 민주주의 원칙을 위협하는 숫자 놀음 (1)

2011년 늦은 봄 어느 날, 데일 슐츠(Dale Schultz)는 위스콘신주 매디슨 도심의 주의회 건물 근처에 있는 한 로펌 건물을 찾았습니다. 통유리 건물에 있는 로펌은 마이클 베스트 앤 프리드리히(Michael Best & friedrich)라는 곳으로 데일 슐츠가 속한 공화당과 밀접한 로펌입니다. 위스콘신주는 20세기 초 흥했던 혁신주의 전통이 남아있는 곳으로, 주 소득세를 처음 도입한 곳이자 산업재해를 입은 노동자가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법으로 못을 박은 곳이기도 합니다. 슐츠는 1982년 처음 주 상원의원에 당선된 이래 줄곧 혁신주의 전통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마이클 베스트 앤 프리드리히 로펌을 찾기 몇 달 전 공무원 노조의 단체교섭권을 박탈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법안에 공화당 의원 가운데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이도 슐츠였습니다. 당의 몇 가지 정책과 의제에는 동의하지 않는 슐츠에게도 공화당이 더 많은 의석을 얻는 일은 반가운 일입니다. 그가 정치에 입문한 뒤 처음으로 공화당이 위스콘신 주지사와 주의회 상하 양원을 모두 장악하게 됐습니다. 10년마다 한 번씩 인구 조사를 토대로 선거구를 획정하고 조정하는데, 공화당은 이론적으로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위스콘신주의 선거구를 새로 그릴 수 있게 된 겁니다. 슐츠는 올여름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선거구를 다시 획정하는 순간은 특히 여당에 큰 기회죠.”

표: 2008, 2012, 2016년 위스콘신 주의회 하원 선거 득표율과 의석수. 전체 득표율과 의석수 사이에 괴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2012년 선거에서 민주당은 더 많은 표를 얻고도 (53% 대 47%) 여당 자리를 공화당에 빼앗겼다. (의석수는 39:60)

로펌 건물에 도착한 슐츠는 보좌관들이 “지도의 방”이라 부르는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슐츠 앞에 방에서 보고 들은 내용은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의 협약서가 있었고, 슐츠는 군말 없이 서명했습니다. 자리에 앉은 슐츠 앞에 로펌 관계자는 슐츠의 지역구가 포함된 매디슨 서쪽 지도를 펼쳤습니다. 선거구를 어떻게 새로 짜면 좋을지 계산해 그어둔 지도였습니다. 슐츠와 학교 장학사였던 슐츠의 부인은 매디슨 서쪽에 약 85만m²에 이르는 농장에서 옥수수와 콩을 재배하며 가끔 꿩을 사냥하기도 합니다. 새로 그어놓은 선거구는 슐츠가 앞서 선거에서 승리했던 투표소를 슐츠의 지역구에 대거 포함했습니다. “이대로 선거를 치르면 재선은 떼 놓은 당상이겠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죠. 의심의 여지가 없었어요.” 슐츠는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습니다.

공화당 소속 위스콘신주 상하원 의원 79명은 거의 모두 한 번씩은 지도의 방에 다녀갔을 겁니다. 새로 선거구가 어떻게 획정되면 자신이 관리해야 하는 지역구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를 사전에 확인하는 것이죠. 물론 그 구체적인 내용은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다는 협약서에 서명하고요. 로펌에서 새로 짠 선거구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민주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을 효과적으로 도시 지역구에 몰아넣고, 시골에 사는 민주당 지지자들은 한 선거구에서 절반을 넘기 어렵게 적당히 나누어 놓는 겁니다. 각각 한데 묶기(packing), 그리고 갈라놓기(cracking)라 부르는 이 두 가지 전략은 제리맨더링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옮긴이: 우리말로 적을 때는 ‘게리맨더링’으로 쓰기도 합니다) 상대 당이 받는 사표(死票)를 늘리고, 우리 당에 유리한 결과를 끌어내는 것이죠.

“우리 당이 다수당이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지도의 방을 방문한 뒤 한 주 상원의원이 핵심 보좌관에게 쓴 이메일의 일부입니다. 이 로펌에 초대받은 민주당원이나 민주당 의원은 당연히 한 명도 없습니다. 공화당 지도부는 선거구 획정 컨설팅을 비롯한 자문료로 총 40만 달러를 로펌에 지불한 우수 고객입니다. 새로운 주 선거구 획정안은 (규정에 따라) 2011년 7월, 한 차례 공청회를 신속하게 거친 뒤 바로 다음 주 표결에 부쳐집니다.

표결에 참여한 모든 공화당원은 찬성표를, 모든 민주당원은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슐츠도 찬성표를 던졌죠. 공화당이 다수당이었기 때문에 선거구 획정안은 그대로 의회를 통과했고, 다음번 선거인 2012년 11월 선거는 해당 선거구를 바탕으로 치러집니다. 공화당은 전체 득표율로는 47%를 얻는 데 그쳤지만, 주 하원 99석 가운데 60석에서 당선자를 배출했습니다. 2014년 중간선거에서는 57% 득표율로 63석을, 2016년 선거에서는 53% 득표율로 64석을 가져갔습니다. 위스콘신주는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세가 엎치락뒤치락하는 이른바 박빙주(purple state)로 분류됩니다. 2008년과 2012년 대선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이 승리를 거뒀지만, 지난 대선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2만2천 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승리했죠. 하지만 주 선거만 보면 공화당이 계속 승리를 거뒀고, 공화당이 줄곧 내세워 온 의제가 실제 정책으로 나타났습니다. 끊임없는 노조 무력화, 낙태 금지 혹은 낙태를 어렵게 하는 보수적인 입법, 그리고 최근에는 전자제품 생산 업체인 폭스콘에 무려 30억 달러 세제 혜택을 주는 법안도 통과됐습니다. 폭스콘은 공화당 지지 성향이 뚜렷한 기업입니다. 슐츠는 선거구 재획정 이후 잇단 선거 결과가 무척 놀랍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결과는 전에는 본 적이 없어요. 선거구 재획정이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지 말 그대로 우리 눈앞에서 똑똑히 펼쳐지고 있습니다.”

공화당은 선거구를 새로 짜는 과정 자체를 철저히 비밀에 부치려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죠. 민주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줄기차게 소송을 제기했는데, 그 가운데 처음 두 차례 소송만 보더라도 연방 판사 세 명은 “선거구 재획정 기준과 전략을 공개하지 않고 어떻게서든 감추려 하고 있다.”며 공화당 위스콘신 지역당 지도부를 질책했습니다. 이듬해 법원은 공화당에 컴퓨터 석 대를 증거 자료로 제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가운데 한 대에서는 관련 자료를 누군가 수정한 흔적이 발견됐으며, 다른 한 대의 하드드라이브는 아예 깨끗이 삭제된 뒤였습니다. 하지만 2016년, 두 번째 소송에 나선 원고 측이 고용한 컴퓨터 전문가가 다른 하드 드라이브에서 새로운 제리맨더링에 이용한 스프레드시트 문서를 발견했습니다. 문서에는 매우 정교한 컴퓨터 모델을 바탕으로 뽑은 숫자와 전략이 담겨 있었습니다.

모델을 만들어낸 건 오클라호마대학교 정치학과의 키스 개디(Keith Gaddie) 교수였습니다. 개디 교수는 선거구별로 어느 정당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지, 즉 민주당을 뽑는 유권자가 많은지 공화당을 뽑는 유권자가 많은지를 정밀히 측정하는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이를 토대로 공화당 보좌관 두 명과 컨설턴트 한 명이 가상의 새로운 선거구를 획정해 검토하는 작업을 반복합니다. 개디 교수가 고안한 회귀 분석표와 대조해가며 가상의 선거구대로 투표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가늠해보고 전체적인 결과를 따져보는 겁니다. 공화당과 민주당이 비슷하게 표를 나눠 가지는 보통의 상황부터 둘 중 한쪽이 압승을 거두는 다소 이례적인 상황까지 잇달아 상정해본 뒤, 개디 교수가 고안한 모델에 따라 공화당 측은 공화당 후보가 가장 많이 당선될 수 있는 선거구 획정 방식을 추려냅니다. 유권자들은 실제로 원래 살던 곳에 그대로 있지만, 지도상에서 도마뱀 꼬리가 길게 말리는 것처럼 제리맨더링에 따라 이 선거구에 배정됐다가 저 선거구로 돌아갔다 하는 식입니다. 공화당 후보의 당선이 유력한 이른바 텃밭의 표는 적당히 주변에 민주당 후보와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선거구로 넘어갈 수 있도록 선거구의 경계를 새로 긋습니다. 다만 유력한 선거구를 도리어 잃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무리하지는 않습니다. (뉴욕타임스)

2부 보기

원문보기

ingppoo

뉴스페퍼민트에서 주로 세계, 스포츠 관련 글을 쓰고 있습니다.

View Comments

    • 안녕하세요 Taehee Lee님, 지적 감사드립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치학 교과서나 언론에서 게리맨더링이라고 더 많이 쓰인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이 단어가 만들어지고 가장 많이 쓰이는 미국에서 제리맨더링에 가깝게 발음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게리맨더링'과 '제리맨더링' 둘 다 우리나라에서 어느 하나만 통용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판단에 원어 발음을 따르는 것이 외국어 우리말 표기에도 더 낫다는 생각으로 '제리맨더링'이라고 썼습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겠습니다만, 게리맨더링으로 쓰는 게 더 나은 이유를 알려주시면 참고해서 표기를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Recent Posts

“설마설마했는데 결국?”… 이 사람이 트럼프의 미래일까

트럼프 2기 행정부를 가장 잘 예측할 수 있는 지표나 역사적 사례, 본보기가 있다면 어떤 게…

6 시간 ago

[뉴페@스프] “돈 때문이 아니다” 최고 부자들이 트럼프에게 정치 후원금을 내는 이유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쓰고…

2 일 ago

‘백신 음모론자’가 미국 보건 수장 되다… “인신공격은 답 아냐”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2기 행정부 인선을 속속 발표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논란이 불가피한 인물도 다수 지명된…

3 일 ago

[뉴페@스프] “레드라인 순식간에 넘었다”… 삐삐 폭탄이 다시 불러온 ‘공포의 계절’

*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4 일 ago

[뉴페@스프] 사람들이 끌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름 결정론’ 따져보니

*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6 일 ago

‘예스맨의 절대 충성’ 원하는 트럼프…단 하나의 해답 “귀를 열어라”

트럼프 2기 행정부 인사가 속속 발표되고 있습니다. 대부분 트럼프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보여준 이들로, 기존 공화당원들…

1 주 a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