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BC 라디오 4채널의 프로그램 “All in the Mind”을 진행하는 클라우디아 해먼드(Claudia Hammond)가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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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의 일입니다. 63살 폴 볼딩 씨는 부인 커스티와 함께 크로아티아에 있는 작은 섬의 해변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해변에 자리를 펴놓은 부부는 한 명씩 번갈아가며 물에 들어가 스노클링을 하고 다른 사람은 해변에서 휴식을 취하며 짐을 맡아주기로 했습니다. 수영을 하고 나온 폴은 커스티가 수영하러 간 사이 자갈 해변에 편 돗자리에 누웠다가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난 폴은 여기가 어딘지,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왔으며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폴은 두려워졌습니다. 갑자기 모든 것이 까마득하게 느껴졌을 테니 당연한 일이죠. 커스티는 당황한 남편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려고 그늘에 그를 앉히고 차근차근 그에게 지금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부부가 어떻게 여기에 왔고,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지를요. 커스티는 라디오4의 “All in the Mind”에 출연해 당시 상황을 회상했습니다.
“이내 남편이 앞선 며칠 동안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뿐 아니라, 새로 기억을 저장하지도 못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어요. 계속해서 똑같은 질문을 적어도 20번은 반복했으니까요. ‘내가 일사병에 걸린 걸까?’, ‘내가 아무래도 햇볕 아래 너무 오래 누워 있던 것 같지?’ 이런 질문을요.”
남편이 치매에 걸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커스티는 덜컥 겁이 났습니다. 커스티는 남편을 그들이 묵던 마을 숙소로 데리고 갔습니다. 며칠간 익숙했던 모습을 보면 기억이 되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한 일이었지만, 소용 없었습니다. 점심으로 뭘 먹을지 도무지 생각해내지 못해 커스티는 남편의 식사까지 대신 주문해줘야 했습니다. 휴가 온 지 열흘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는데, 폴은 지난 열흘간 있던 일을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 휴가 중에 난생 처음 먼 친척들을 만난 일도 잊어버렸습니다.
시간이 흘러 오후가 되자, 폴은 조금씩 나아졌습니다. 전날 산책하면 좋겠다고 말했던 곳에 가서 좀 걷자고 먼저 제안한 것도 폴이었습니다.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는 명백한 신호였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쯤 더 지나자 모든 기억이 돌아왔습니다. 정상으로 돌아온 폴도 평정심을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기억을 잃었다가 되찾기까지 걸린 약 6시간 정도에 있었던 일에 관한 기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는데,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폴은 그 6시간 동안은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영국으로 돌아온 폴은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의사는 50세 이상에게서 종종 나타나는 일과성 건망증(transient global amnesia)이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영국 병원 응급실에 오는 환자들 가운데 한 달에 두세 명 정도는 폴처럼 일과성 건망증 증세를 보이는 환자입니다.
증세가 나타나도 사람들은 여전히 운전하는 법을 기억하고 언어 능력도 손상을 입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들은 앞서 며칠간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폴이 해변가에 앉아서 커스티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수없이 되풀이합니다. 이 또한 새로운 내용을 기억에 저장하지 못해 나타나는 일과성 건망증의 전형적인 증세입니다.
아직 일과성 건망증을 일으키는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의사들은 애초에 일과성 건망증이 간질이나 편두통의 증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질병이나 몸의 상태와 일과성 건망증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이 지금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삶과 행동에 관한 기억을 처리하고 저장하는 건 대뇌 측두엽에 있는 해마(hippocampus)라는 부위입니다. 바닷속에 사는 해마와 모양이 비슷해 그렇게 불리는 이 곳에서 기억을 장기 저장하는 일도 맡아서 하는데, 일과성 건망증은 여기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나타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엑세터대학교 병원 인지행동신경과의 아담 제만 교수의 설명을 빌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해마가 일시적으로 가동을 안 하게 돼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폴에게 나타난 증세가 대표적이죠. 지난 몇 일, 몇 주 정도의 기억을 잃고, 증세가 지속되는 동안은 새로운 기억을 저장하지 못합니다.”
뇌를 촬영한 연구도 이 가설에 들어맞습니다. 일과성 건망증 증세가 나타나는 동안은 일시적으로 해마 부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프랑스 의료진은 일과성 건망증을 앓은 여성 환자 142명을 관찰한 결과 격렬한 논쟁 등 정신적으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났을 때 증세가 나타나는 가능성이 컸다고 분석했습니다. 남성의 경우 신체적으로 고된 일을 한 뒤나 찬물에 빠지는 등 몸이 힘들 때 증세가 더 빈발했습니다. 또한, 평소에 두통을 자주 앓는 이들에게서 일과성 건망증이 더 자주 나타났습니다.
가끔 일시적 간질발작성 기억상실증(transient epileptic amnesia) 환자에게 일과성 건망증이라고 오진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간질에 수반하는 기억상실 증세는 대개 훨씬 짧게, 자주 나타나며 아침에 잠에서 깼을 때 대표적으로 나타납니다. 제만 교수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일과성 건망증을 분간해내기 어렵지 않다고 말합니다.
“증세를 앓고 난 뒤 쉽게 말해 폴이 묘사하는 기억이나 증세와 비슷한 묘사를 하는 환자라면 거의 예외 없이 일과성 건망증을 겪었다고 보면 됩니다. 증세가 한창 나타나서 무언가를 기억해내지 못하는 중이라면 속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일과성 뇌허혈 발작(ministroke)이나 간질 발작, 혹은 정신성 기억상실증일 수도 있으니까요.”
정신성 기억상실증을 앓는 환자는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두 까먹습니다. 다만 새로운 기억을 저장할 수는 있습니다.
일과성 건망증은 신기하게도 대개 한 번 일어나면 좀처럼 재발하지 않습니다. 또한, 다른 질병이나 문제의 전조가 아니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일과성 건망증이 재발하는 사례는 극히 드뭅니다. 다만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누구든 크게 당황하고 겁을 먹기 마련입니다.
폴은 다시는 그런 끔찍한 경험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설사 같은 일이 또 일어나더라도 이번에는 커스티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확실히 알고 대처할 수 있을 겁니다. (BBC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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