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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통신, 한국 정부에 의한 부랑자 집단 학대 및 학살 사건 은폐를 보도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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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부터 돈을”

형제복지원에서의 폭력은 강제 노동에 기반을 둔 대규모 수익 사업의 그림자 아래서 자행됐다. 복지원 내 공장은 명목상 원생들의 직업 훈련소였다. 그러나 AP가 단독 입수한 부산시청 문건에 따르면, 1986년 말에 이르자 공장 중 11곳이 수익을 내고 있었다.

이 문건에는 형제복지원이 명시되지 않은 기간 동안 새벽부터 밤까지 일한 1천 명 이상의 원생들에게 지금 화폐 가치로 170만 달러에 달하는 임금을 지불했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김용원 변호사는 관련 문건과 인터뷰를 통해 4천여 명의 형제복지원 원생 대다수가 임금도 받지 못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당시 조사는 정부의 지시로 조기에 마무리되었지만, 그때 인터뷰한 100명의 원생 가운데 임금을 받았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AP가 만난 원생 20명 중에서도 복지원 시절에 임금을 받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중에 조금이나마 돈을 받은 사람은 3명뿐이었다.

성인들은 복지원 안팎의 건설 공사장에서 일했다. 아이들은 흙을 나르거나 벽을 쌓는 일에 동원되기도 했지만, 주로 볼펜이나 낚시용 바늘을 만들었다.

복지원에서 만들어진 제품 가운데는 외국과 연관된 것들도 있었다. 박인근 원장의 자서전에 따르면 봉제 공장에서 만든 셔츠는 유럽으로 팔려나갔고, 1980년대 미국 등 해외 시장에 의류를 수출하던 대우 직원들이 원생들을 교육하기도 했다고 한다. 박 원장은 대우에서 나온 직원이 복지원과 파트너십을 체결하기 전 작업장을 둘러보기도 했다고 썼지만, 대우인터내셔널 홍보팀의 김진호 씨는 당시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세부사항은 확인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1970년대에 수감 생활을 했던 원생들은 일본 수출용으로 낚싯바늘에 낚싯줄을 연결해 일본어가 쓰인 상자에 담아 포장하느라 밤늦게까지 일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형제복지원에서 8년간 생활했던 김희곤 씨는 1970년대 초반, 이 상자들이 불량품 판정을 받고 대량 반품되어 돌아왔을 때 동료들과 함께 심하게 얻어맞았다고 했다.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수감 생활을 했던 박경보 씨는 “국제상사”라는 로고가 새겨진 운동화 바닥을 기억한다. 지금은 사라진 국제상사는 1970, 80년대 미국과 유럽으로 신발을 수출하던 회사였다.

이런 식의 운영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원생들을 제외한 모두가 이익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 공무원들은 담당지역 내 부랑자들을 수용할 시설이 필요했기 때문에 원생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고 재정적으로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점검을 해야 하는 규정이 있었음에도 매년 형제복지원과 계약을 갱신했다. 복지원은 원생 수를 기준으로 정부 보조금을 받았기 때문에 경찰에 더 많은 부랑자를 잡아들여 달라고 부추겼다는 사실도 조사에서 드러났다. 경찰관들이 잡아넣은 부랑자 수에 따라 승진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부산시청 관계자 두 사람은 복지원이 30년 전에 문을 닫았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부산경찰청의 허귀용 대변인 역시 같은 이유로 세부 사항을 확인해줄 수 없다고 했다.

복지원의 소유주였던 박인근 원장은 사회복지 관련 표창을 두 번이나 받았고 정부 자문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1985년에는 박 원장 버전의 복지원 이야기, 즉 “밑바닥 인생”을 보살핀 헌신적인 영웅의 이야기가 TV 드라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박 원장은 이후 횡령을 포함한 사소한 혐의 몇 가지로 기소되어 잠깐 옥살이를 했지만, 형제복지원의 일로는 처벌받은 적이 없다. 1987년에 이르러서야 형제복지원은 수사 대상이 됐고, 당시 조사관들은 박 원장의 사무실 금고에서 오늘날 화폐 가치로 500만 달러에 이르는 미국 달러화와 엔화, 예금증서를 찾아냈다.

박 원장은 자서전과 법원 심리, 관계자들과의 대화에서 모든 범법 행위 사실을 부인했으며, 그저 정부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는 태도를 고수했다. AP는 가족과 지인, 활동가들을 통해 박 원장과의 접촉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AP는 대신 형제복지원의 2인자였던 임영순과 전화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임영순은 박 원장의 처남으로 현재 호주에서 개신교 목사로 살아가고 있다. 그는 형제복지원의 비리와 폭력, 강제 노동에 대한 이야기에 발끈하면서, 박 원장이 길거리에서 말썽꾼들을 없애 부산을 발전시킨 “헌신적인” 사회복지가라고 주장했다.

임 씨는 복지원 내에서 구타에 의한 사망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이는 원생들 사이의 다툼에서 비롯된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시설의 사망률이 높았던 이유는 이미 신체적,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사람들이 복지원에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차피 길에서 죽었을 사람들이라고요.”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

박인근 원장이 복지원 운영으로 돈을 긁어모으는 동안, 사망자 수는 늘어만 갔고, 원생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복지원서의 둘째 날, 최승우 씨는 전날 밤 성폭행의 충격으로 정신이 멍한 상태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목욕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경비원이 한 여자 원생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 머리에서 피가 날 때까지 몽둥이로 마구 때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나뭇잎마냥 떨면서 그 자리에 서 있었어요. 그날 저녁 다시 강간을 당하면서도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했습니다.”

또 한 번은 간수 7명이 한 사람을 때려눕히는 장면도 목격했다. 이들은 소리를 지르는 남자에게 푸른색 담요를 씌우고 마구 구타했다. 담요에 피가 배어 나왔다. 담요 속에서 맞아 죽은 남자는 눈이 뒤로 돌아가 있었다.

복지원의 자체 집계에 따르면 1975~1986년 사망자는 513명이었으나, 실제 사망자 수는 분명히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용원 변호사가 인터뷰한 원생들은 복지원 관계자들이 도주를 우려해 사람이 거의 사망에 이를 때까지 병원에 보내주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복지원은 박 원장의 왕국이었고, 폭력은 박 원장의 지배 수단이었습니다. 사람이 매일같이 맞아 죽는 곳에 감금되어 있다 보면, 강제 노역이나 학대, 강간에 대해 불평할 여유는 없죠.” 김용원 변호사의 설명이다.

정부 기록에 따르면, 대부분 원생들이 복지원 입소 당시에는 비교적 건강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1985년에는 최소 15명이, 1986년에는 22명이 입소한 지 한 달 만에 사망했다.

김용원 변호사가 수집한 복지원 내부 문건과 인터뷰 기록에 따르면, 1985~86년 사이 기록으로 남은 180건의 사망 증명서는 모두 정명국이라는 의사 한 사람이 발급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정 씨는 사망 증명서에 사인을 대부분 “심부전”이나 “쇠약”이라고 적어 넣었다.

형제복지원의 하루는 해가 뜨기도 전에 시작됐다. 원생들은 새벽 5시 반 원내 교회의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지는 기도 시간에 맞춰 일어나야 했다. 기도 후, 아침 구보가 끝나면 원생들은 아침 식사를 하고 작업장이나 건설 현장으로 향했다.

시청 공무원이나 외국 선교사, 자원 봉사자들이 시설을 방문하는 날이면, 특별히 선발된 건강한 원생들이 “접대용” 복지원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수 시간에 걸쳐 준비 작업을 했다. 그럴 때면 나머지 원생들은 경비원의 감시하에 숙소에 갇힌 채, 아무것도 모르는 외부인들이 시설을 살펴보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보았다.

“우리는 감옥에 갇힌 신세였어요. 하지만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최승우 씨의 말이다.

오후 6시가 되어 숙소의 문이 잠기면 간수들은 자기 담당 구역 내 60~100명의 아이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강간도 종종 일어났다.

한때 복지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부산의 한 학교 교장은 당시 원생들이 자신의 의지에 반해 감금되어 있었음을 인정했고, 복지원을 대규모 강제 수용소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평판을 걱정해 익명을 요구하면서도, 복지원의 관행을 옹호하는 태도를 고수했다. 그는 다루기 힘든 인간들, 그것도 억지로 끌려온 원생 수천 명으로 가득 찬 시설을 운영하려면 심한 폭력과 군대식 규율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1980년, 9세의 나이로 부산 기차역에서 경찰에게 끌려 복지원에 들어온 박선이 씨는 탈출에 성공한 극소수 중 한 사람이다. 박 씨는 복지원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가장 가혹한 종류의 폭력이 탈출을 시도한 자들에게 가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복지원에서 5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는 동안 박 씨는 “내 인생이 영원히 이 상태로 이어지고 결국 복지원 안에서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박 씨는 다른 여자 원생 5명과 함께 공장에서 훔쳐온 망가진 톱으로 밤마다 2층 숙소 창문의 쇠창살을 조금씩 잘라냈다. 아침이 되면 껌으로 창살을 도로 붙여두었다. 오랜 작업 결과, 마침내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깨진 유리를 박아넣은 담장을 넘어 뒷산으로 도망쳤다.

박 씨가 문산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모습을 본 아버지는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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