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교복을 입은 14세 소년은 운동화 끝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경찰관이 빵 한 쪽을 훔치지 않았느냐며 추궁해오자 가슴이 쿵쾅거렸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최승우 씨는 이후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쏟아낸다. 경찰관은 소년의 바지를 끌어 내리고 성기 부근에서 라이터를 껐다 켰다 했고, 결국 소년은 짓지도 않은 죄를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곤봉을 든 두 남자가 소년을 끌고 간 곳은 산속에 위치한 형제복지원. 현대 한국의 가장 끔찍한 인권 유린 사태 가운데 하나가 벌어진 바로 그곳이다.
최승우 씨가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갔던 1982년의 그 밤, 숙소의 경비원은 그를 강간했고 이후 그런 일은 몇 번이고 반복됐다. 강제 노역과 구타로 점철된 지옥 같은 5년을 보내면서, 맞아 죽은 남녀 원생들의 시신이 쓰레기처럼 실려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최승우 씨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거리에서 시설로 끌려간 수천 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당시 한국의 독재 정부는 올림픽을 국제 사회에서 근대 국가로 인정받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노숙자, 주정뱅이들이 대상이었지만 대부분은 미성년자와 장애인이었다. AP통신이 수백 건의 기밀문서와 당시 관계자, 원생들의 인터뷰를 통해 파악한 바에 따르면 가장 규모가 컸던 형제복지원을 비롯한 이른바 “부랑자 수용 시설”에서 일어났던 학대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정도가 심하고 광범위했다.
또한, 정부 최고위급 인사가 나서 문제를 덮었던 탓에 형제복지원에서 일어난 살인과 강간에 대해 지금까지 그 누구도 책임을 지거나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AP통신의 취재를 통해 드러났다. 앞서 두 차례의 조사가 진행됐을 때 이를 저지했던 고위 관료들은 이후 승승장구했고, 그중 한 사람은 여전히 집권당의 자문 역할을 맡고 있다. 당시 원생들의 노예 노동으로 만들어진 물건은 유럽과 일본 등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고, 당시 형제복지원의 소유주였던 가족은 2년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복지 시설을 운영하고 있었다.
한국이 2018년 두 번째 올림픽 개최를 앞둔 오늘날에도 수천 명의 원생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으며, 지금까지 보상은커녕 가해자들로부터 공개적인 시인과 사과도 받지 못했다. 피해자들 가운데 소수가 목소리를 높이며 재조사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 정부는 사건의 재조명을 피하고 있다. 증거가 너무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야당 국회의원의 조사 요구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안정태 행정자치부 사회통합지원과장은 하나의 인권 유린 사태에 집중하는 것이 정부에 재정적으로 부담이 되며 좋지 않은 전례를 남길 수 있다며,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2000년대 중반 한시적으로 운영되었던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문제를 제기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이후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개별 사례 하나하나에 대해 모두 법을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과거를 잊을 수 없다. 한 원생은 수개월 간 국회 앞에서 정의를 요구하며 1인 침묵시위를 하기도 했다. 최승우 씨는 몇 차례나 자살 시도를 했고, 지금은 매주 심리 치료를 받고 있다. “정부는 계속해서 묻으려고만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맞서야 하죠? 우리가 목소리를 낸들, 누가 들어줬겠습니까?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너무나 절실해서 이렇게 울부짖고 있습니다. 제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지옥 속의 지옥”
한때 고아원이었던 형제복지원은 한창때 부산에 20여 개의 공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목공품, 금속가공품, 의류, 신발 등 다양한 물건이 대부분 임금을 받지 못하고 강제로 일하던 원생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높은 콘크리트 건물이 줄지어 올라가면서 원생들의 존재는 높은 벽 뒤로 묻혔고, 이들은 감시견을 끌고 몽둥이를 든 경비원들의 감시 속에 그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 벽 너머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은 한국의 근대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한국은 당시 40년에 가까운 가혹한 일제 강점기와 뒤이어 나라 전체를 잿더미로 만든 한국전쟁의 여파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민주화 이전,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은 경제 성장에만 지나치게 집중한 군부 독재자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1975년, 현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경찰과 지방 관청에 거리의 부랑자 문제를 해결해 도시를 “정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경찰은 상점 주인들의 도움을 받아 걸인, 껌과 자잘한 물건들을 파는 노점상, 장애인, 미아와 학교에 다니지 않는 청소년, 반정부 전단을 소지한 대학생을 포함한 반체제 인사 등을 잡아들였다.
이렇게 붙잡힌 사람들은 전국 36개 시설에 수용되었다. AP가 입수한 정부 문건에 따르면, 1986년이 되자 이렇게 수용된 인원은 1만6천 명에 달했다. 5년 전 8천6백 명보다 많이 증가한 수치였다.
형제복지원에는 4천 명에 달하는 원생들이 있었다. 하지만 90%가량이 정부가 제시한 “부랑자”의 조건에도 맞지 않았고, 따라서 애초에 갇혀있을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게 검사 출신 김용원 변호사의 말이다. 그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담당했던 당시 복지원의 기록과 인터뷰 내용을 검토한 끝에 이런 결론에 이르렀지만, 조사는 이후 윗선의 지시로 중단되었다.
형제복지원의 내막은 책임자의 보조 노릇을 하며 사정을 좀 더 잘 알 수 있었던 원생 이채식(46) 씨의 증언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AP는 이채식 씨의 증언 내용을 정부 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씨는 13세 때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킨 후 형제복지원으로 보내졌다. 복지원에서 처음 일을 맡았던 곳은 의료실이었다. 하루 두 차례, 이 씨와 동료 네 사람은 원생들의 상처에 소독약을 붓고 집게로 구더기를 집어내는 일을 했다. 이들 가운데 정식 의료 훈련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이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어요. 지옥 안의 지옥이었죠. 죽어가는 환자를 그냥 내버려 두기도 했습니다.”
원생 중에서도 강한 사람은 약자를 강간하거나 구타했고, 음식을 빼앗기도 했다고 이 씨는 말한다. 이 씨도 의료동 간수에게 강간을 당한 후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
1년 후, 이 씨는 경비 책임자 김광석의 개인 보조가 되었다. 김광석 역시 원생 출신이었지만 원장에게 충성해 권력을 얻은 인물이었다. 많은 원생은 김광석이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고 기억한다. AP는 김광석을 찾으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키는 작았지만, 다부진 몸에 피부는 그을린 색이었던 김광석은 매일 같이 “교정실”에서 원생들을 구타했다. 종종 사람이 죽어 나가기도 했다. 이 씨는 김광석이 하루 두 번 원장에게 보고할 환자, 사망자 수를 집계할 때도 함께 했다. 하루에 너덧 명씩 사람이 죽어 나가는 날이 더러 있었다.
이 씨가 직접 묘사한 복지원의 실상은 이 시설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또 일상적으로 사악한 곳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어떤 날은 김광석이 아침 조깅을 하는 박인근 원장에게 접근해 밤새 원생 한 명이 맞아 죽었다고 보고하는 것을 듣기도 했다. 박 원장은 김광석에게 복지원 담장 밖 뒷산에 시체를 묻으라고 지시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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