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치 장관을 임명한다면 여기에는 여성, 소수인종이라는 점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명권자에게도 정치적인 부담이 갈 수 있는 일이긴 하죠. 그래서 오바마 대통령에게 좀 더 안전한 패가 있다면, 출신 배경만으로 갖는 역사적인 상징성은 조금 덜하더라도 공화당 유권자들이 더 쉽게 받아들일 만한 인물을 고르는 겁니다.
오바마 정권 혹은 클린턴 정권에서 임명된 항소법원 판사들 가운데 판사 임명 당시 공화당으로부터도 꽤 많은 찬성표를 받은 이들이 이 조건을 만족하는 후보입니다. 1997년 임명 당시 공화당으로부터 찬성표를 32표 받은 메릭 갈랜드(Merrick Garland) 판사, 2013년 임명될 때 사실상 상원 만장일치(96:0)로 임명동의안이 통과된 제인 켈리(Jane Kelly) 판사 등이 꼽힙니다.
이 전략은 아마도 민주당 안에서는 큰 지지를 받지 못할 겁니다. 반대로 공화당 의원들 사이에서 편을 가르는 데는 효과가 클 수도 있습니다. 당장 켈리 판사는 2013년 임명 당시 공화당 소속의 상원 법사위원장 찰스 그래즐리(Charles Grassley)가 지지했던 인물입니다. 그래즐리 위원은 지난 16일 오바마 대통령이 대법관을 임명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에서 한발 물러나 오바마 대통령이 임명하는 후보의 인사청문회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공화당 상원의원들은 민주당 대통령이 임명한 후보라도 합리적인 인물인 경우 당적을 뛰어넘어 이 결정을 지지하곤 했습니다.
대법관 후보를 두고 공화당 내의 의견이 갈리는 건 대선을 앞둔 공화당 대통령 후보에게는 적잖은 타격이 될 수 있습니다. 보수 성향의 유권자들도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 의원들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끌려가는 듯한 인상을 받고 실망할 것입니다.
반대로 민주당 지지자들 가운데서도 특히 진보적인 성향의 유권자들은 지나치게 안정적인 선택에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민주당 대통령이 임명한 마지막 백인 남성 대법관은 1994년 임명된 스티븐 브레이어(Stephen Breyer) 대법관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대단히 진보적인 인물을 임명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겁니다. 수세에 몰린 공화당을 더욱 몰아붙이고, 무엇보다 민주당 지지자 가운데서도 특히 진보 성향의 유권자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카드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게 11월 선거에서 대통령 선거와 주요 경합지역의 상, 하원 선거에 유리하다는 정치적 판단을 내린다면 오바마 대통령으로선 못 할 이유도 없는 일입니다.
이념적으로 대단히 뚜렷하게 갈라진 현재의 정치 지형에서 내리는 이런 선택은 사실상 정치적 선전포고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7년 동안 공화당의 숱한 발목잡기와 어깃장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오바마 대통령으로서는 민주당 후보가 대선에서 이길 것이라는 확신만 있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시도일 겁니다.
캘리포니아주 검찰총장인 카말라 해리스(Kamala Harris)처럼 민주당 내의 차세대 법조인을 택하거나 항소법원 판사 가운데 특히 진보적인 색채가 뚜렷한 다이앤 우드(Diane Wood) 같은 인물을 임명하는 것도 가능한 일입니다. 아니면 매사추세츠주의 엘리자베스 워렌(Elizabeth Warren) 상원의원을 고르면 어떻게 될까요?
민주당 내에서도 특히 진보적인 유권자들로부터 폭넓은 지지와 존경을 받는 워렌 의원은 오랫동안 소비자 보호 운동을 펼쳐 온 법률 전문가로서 경제적 불평등이 첨예한 화두가 된 민주당 대선 경선 국면에서 더욱 주목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샌더스가 경선에서 진다면 힐러리 클린턴에게는 샌더스를 지지했던 젊은이와 진보 성향 유권자들을 끌어안는 것이 가장 큰 과제가 될 텐데, 워렌 의원을 대법관으로 임명한다면 이들을 붙잡아두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버드 법대 교수 출신의 워렌 의원이 의회 청문회를 비롯한 임명 절차를 뚫고 갈 의지가 있느냐도 문제고, 오바마 대통령이 엘리자베스 워렌이라는 인물을 얼마나 신뢰하는지에도 의문 부호가 따릅니다. 오바마는 앞서 워렌 의원을 (우리나라로 치면) 소비자보호원장에 임명할 수 있는 기회에서 워렌을 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진보 성향의 대법관이 스칼리아의 자리를 대신하면 아홉 명 대법관들의 성향은 5:4로 뚜렷한 진보 우위가 됩니다. 이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환호할 일인 동시에 공화당 지지자들은 분노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아마도 실현 가능성이 가장 낮은 시나리오에 해당될 겁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아예 공화당 성향의 보수 인사를 대법관으로 임명하는 것이죠. 대통령은 초당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 워싱턴 의회 정치의 끝이 보이지 않는 교착 상태에 질린 유권자들에게는 지지를 받을 만한 결정이긴 합니다.
상대편으로 분류되는 인물을 과감하게 끌어안고 임명함으로써 선거에서 상대편의 표를 가져온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1956년 공화당 소속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민주당 출신의 가톨릭 신자 윌리엄 브레넌을 임명했고, 브레넌은 상원이 휴회 중이라 청문회 없이 대법관이 됐습니다. 곧이어 치러진 선거에서 아이젠하워는 브레넌의 고향이 뉴저지주를 비롯해 북동부 주에서 승리했습니다. 물론 대법관 임명 하나로 표가 움직였다는 인과 관계를 증명하기는 쉽지 않고, 60년 전과 지금의 정치 문화도 크게 다르지만 말이죠.
오바마 대통령이 만약 이 전략을 택한다면 두 가지 정도 선택지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상원 법사위원회에서 가장 오랫동안 일한 오린 해치(Orrin Hatch) 의원을 임명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다음 달이면 82살이 되는 해치 의원의 나이를 생각하면 대법관으로서 그는 큰 족적을 남기지는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면 공화당 출신 인물 가운데 온건 보수에 해당해서 민주당에서도 크게 거부감이 없는 인물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낙태를 인정한 네바다 주지사 브라이언 산도발(Brian Sandoval)은 지난해 동성 결혼을 허용하는 대법원 판결 이후 이를 어떻게든 거부하거나 우회하려는 다른 보수적인 주지사들과 달리 이 결정을 존중해 받아들였습니다. 급속하게 늘어나는 라티노 유권자의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스리칸스 스리니바산(Srikanth Srinivasan)은 2013년 상원의 97:0 동의를 거쳐 항소법원 판사로 임명됐습니다. 스리니바산이 대법관이 된다면 인도계 미국인으로는 처음이고, 아시아계 미국인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겁니다. 다만 민주당으로서는 표를 더 많이 가진 흑인이나 라티노 등 소수인종 유권자들의 실망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어쨌든 스리니바산을 임명했을 때 공화당 의원들이 공표한 대로 인사청문회를 거부하는 등의 행동에 나선다면 이는 즉시 민주당에 공화당을 공격할 구실이 될 겁니다.
인도에서 태어나 스탠포드 로스쿨을 졸업한 스리니바산은 민주, 공화당 가릴 것 없이 미국 정치인들이 즐겨 말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전형적인 성공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당 전략가 중에는 공화당이 이민자들을 소홀히 하는 점을 집중적으로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공화당 대선 후보 가운데 강경 보수 성향의 테드 크루즈 의원은 스리니바산 판사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습니다. 둘은 젊은 시절부터 함께 일하면서 친분을 쌓았는데, 크루즈 의원은 2013년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스리니바산을 가리켜 “일을 아주 훌륭하게 수행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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