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 현역 축구선수 가운데 악동이란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선수는 아마도 우루과이 국적의 스트라이커 루이스 수아레즈(Luis Suárez)일 겁니다. 골을 넣어야 하는 스트라이커가 갖춰야 할 골에 대한 갈망, 욕심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고 위치를 가리지 않고 골을 넣는 실력 또한 최고 수준이지만, 경기 중에 상대방을 깨물거나 심판의 눈을 속이는 다이빙 등 갖은 기행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선수가 또 수아레즈입니다. 지난 2011년 10월 15일 이후 수아레즈에게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수식어가 하나 더 추가됐습니다. 리버풀 소속이던 당시 라이벌 맨체스터유나이티드와의 경기 도중 상대편인 에브라와 언쟁을 벌이던 도중 흑인인 에브라를 향해 “너가 검둥이(negro)라서 너랑은 말 섞지도 않을 거야”라고 말을 했다고 알려졌고, 수아레즈는 말그대로 온갖 비난을 한몸에 받는 신세가 됐습니다. 국내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수아레즈와 쓰레기를 합쳐 ‘수아레기’라는 별명으로 통했는데, 영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은 대우를 받았죠. 수아레즈는 10월 15일 경기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설명을 시작합니다.
그 날 경기장에서 제가 에브라를 향해 스페인어로 “negro(검다는 뜻의 형용사)”라는 말을 했냐고요?
네,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제가 (에브라와) 스페인어로 언쟁을 벌였고, 스페인어로 “negro”라고 말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스페인어로 “negro”가 영어에서 비슷한 발음의 단어와 같은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결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닙니다. 그 날 경기가 끝나고 저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련의 일들과 저를 향한 악의적인 비난에 저는 당혹감을 감추기 어려웠습니다. 애석하게도 제가 손을 쓸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고, 이제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꼬리표는 영원히 저를 따라다닐 겁니다. 리버풀과 맨체스터유나이티드는 리그를 대표하는 라이벌입니다. 저 또한 리버풀의 주전 선수로써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죠. 그 날 이전에도 맨체스터유나이티드와 경기를 치른 적이 있지만, 라이벌 경기에서 으레 일어나는 거친 몸싸움, 신경전은 있었어도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10월 15일 경기가 끝난 뒤) 저는 리버풀 구단의 스태프이자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에 모두 능통한 코몰리(Damian Comolli) 씨로부터 따로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와 에브라 사이에 별 일 없었냐는 질문이었죠. 처음에는 왜 그런 질문을 제게 하는지도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문제가 될 만한 일이 있기는 했는지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었죠. 아, 경기 중에 잠깐 언쟁을 벌이긴 했죠. 하지만 상대편 수비수와 저 사이에는 종종 있는 일입니다. 별로 특별할 게 없는 상황이었죠. 코몰리 씨는 다소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맨체스터유나이티드가) 인종차별 문제를 들고 나올지도 모르겠어.” 저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차분히 경기 중 일어난 일을 복기해봤습니다.
에브라와 몸싸움에 신경전이 잦아지자 주심이 저희 둘을 불러세워 구두로 주의를 줬습니다. 에브라는 이때 저를 향해 왜 자꾸 자기를 걷어차냐고 불만 섞인 스페인어로 말했습니다. 경기 중에 보통 공격수를 거칠게 막아세우는 수비수가 심판의 눈을 피해 공격수를 차거나 꼬집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심판 앞에서는 반대로 울상을 지으며 억울함을 호소하죠. 그것 자체로 잘잘못을 따질 일은 아니지만, 저도 심판에게 에브라가 하는 말이 틀렸다는 걸 어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에브라의 모국어가 스페인어가 아니기에) 유창하지 않은 스페인어였지만, 저는 제 모국어인 스페인어로 응수했죠. 아주 짧은 설전 아닌 설전이 오갔고, 여기서 저는 아마도 영원히 저를 괴롭힐 단어 “negro”를 한 차례 사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스페인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negro(발음: 네그로)”라는 단어가 쓰였다는 겁니다. 비슷한 발음의 영어 단어와는 함축하는 의미가 완전히 다른 단어입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같은 철자에 발음이 다른 영어 단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 단어가 얼마나 끔찍한 뜻을 갖고 있는지도 잘 알고요. 하지만 스페인어 “negro”는 말그대로 검다는 뜻을 지닌 형용사일 뿐입니다. 그 이상 어떤 함축적 의미도, 역사적 배경도 없습니다. 누군가를 도발하거나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모욕을 줄 때 사용하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잘생긴(guapo), 뚱뚱한(gordo), 마른(flaco), 금발 또는 금빛의(rubio)와 같은 형용사들처럼 그냥 형용사일 뿐입니다. 우루과이에서는, 또는 스페인어권에서는 검은 머리색을 가진 친구를 부르는 애칭도, 피부색이 짙은 누군가를 지칭하는 별명도 네그로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누군가를 검다고 놀리거나 모욕하는 뜻은 추호도 없어요. 제 아내도 가끔 저를 negro라 부르고, 할머니는 가끔 할아버지나 저를 negro의 변형 애칭인 negrito라 부르기도 합니다. 물론 제가 에브라를 negro라 칭한 게 친근한 감정을 나타내려 했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우린 분명 경기를 치르며 얼마간 흥분한 상태에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죠. 그렇다고 negro가 욕설이거나 그를 모욕하기 위해 꺼내든 단어는 절대 아닙니다. 그냥, 말 그대로 상대방을 부른 겁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른 상황을 상세히 복기하는 마당에 한 가지 더 짚고 갈 부분이 있습니다. (아마도 심판도 들으라며) 큰 소리로 투덜대며 저를 향해 스페인어로 불평 섞인 질문을 하는 에브라를 향해 제가 한 말은 정확히 “Por qué, negro?”였습니다. Por qué는 (띄워쓰면) ‘왜’라는 전치사입니다. 저는 에브라에게 “왜 그래?” 내지 “무슨 일이야? (내가 뭘 잘못했길래 그렇게 불만이야)?” 정도를 물은 겁니다. 여기서 negro는 앞서 말했듯이 아무 다른 뜻 없는 호칭이었죠. 저는 (스페인어를 아는) 코몰리 씨에게 이 맥락을 정확히 전달했습니다. 코몰리 씨도 이를 심판진과 축구협회에 정확히 전달했을 겁니다. 그런데 어디서 곡해가 일어났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에브라에게 한 말은 “Porque eres negro”였던 것으로 둔갑합니다. Porque는 (붙여쓰면) ‘왜냐하면’이라는 부사입니다. 여기에 제가 절대로 말한 적 없는 동사 eres가 더해졌죠. 저 말 뜻은 모든 언론이 대서특필한 그 뜻입니다. “너가 검기 때문이야”쯤으로 해석이 가능하죠. 스페인어 negro에 모욕적인 뜻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전혀 다른 뜻을 갖는 새로운 문장이 됩니다.
스페인어와 영어의 전혀 다른 맥락의 차이는 깡그리 무시됐고, 이 단어 하나는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저는 당연히 누군가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말이나 행동을 다르게 할 사람이 아닙니다. “왜 그래?”라는 질문이 “너가 검둥이라서 그래”라는 끔찍한 모욕적인 언사로 둔갑했지만, 사람들은 이 미묘하지만 어마어마한 차이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고, 저를 인종차별주의자로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에브라는 처음에 제가 영어로 더욱 모욕적인 단어인 “nigger”라는 말을 썼다고까지 주장했다가 자기가 잘못 기억하고 있다고 한발 물러섭니다. 저는 이미 축구계에서 영원히 추방해버려야 할 악마가 된 이후였습니다. (Guardian) – 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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