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핑커] 셰익스피어: 최초의 위대한 심리학자(1)
2015년 2월 10일  |  By:   |  과학  |  5 Comments

아틀란틱 지의 “By Heart” 시리즈는 작가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로 꼽는 작품이나 단락을 이야기하는 공간입니다. 하버드의 언어학자이자 인지과학자인 스티븐 핑커는 셰익스피어의 “법에는 법으로”의 한 단락을 이야기했습니다.

스티븐 핑커는 사회를 바꾸는 사람들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도덕주의자들은 어떤 행동을 비난하고 다른 행동을 옹호합니다. 반면, 과학자들은 왜 인간이 그렇게 행동하는 지를 이해하려 노력하며 그들이 스스로 변화할 수 있도록 만들려 합니다. 스티븐 핑커는 셰익스피어의 “법에는 법으로(Measure for Measure)”에 이런 두 관점이 잘 설명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과학적 관점과 도덕적 관점의 한계를 이야기하며 인간이 가진 분석적 사고방식이 인간이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라고 이야기합니다.


 

나의 책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에서 나는 폭력의 심리학과 뇌과학에 대해 두 챕터를 썼습니다. “내면의 악마들(Inner Demons)”에서는 사람들의 뇌가 어떻게 사람들이 폭력을 휘두르도록, 즉 복수, 정복, 사디즘, 착취 등의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지를 다루었고 “선한 천사들(Better Angels)”에서는 우리를 이런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뇌의 특징인 연민, 자기억제, 이성, 도덕적 규범 등을 다루었지요.

“내부의 악마” 장을 나는 셰익스피어의 “법에는 법으로”에서 인용한 다음 문단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여, 거만한 인간이여(But man, proud man),
하찮고 덧없는 권위로 감싸고(Drest in a little brief authority),
가장 확신하는 것에 대해 가장 무지하니(Most ignorant of what he’s most assur’d),
그의 허약한 본질은, 성난 원숭이처럼(His glassy essence, like an angry ape),
너무나 터무니없는 술책들을 저질러(Plays such fantastic tricks before high heaven)
하늘의 천사들을 눈물짓게 하는구나(As make the angels weep).”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김명남 역 에서 인용)

이 희곡에서 이사벨라의 동생 클라우디오는 자신의 약혼자를 결혼전에 임신시켰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 받습니다. 이사벨라는 이에 동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베니스의 임시 총독이 된 안젤로의 자비와 상식에 호소합니다.

이 희곡은 청교도적인 엄격한 법 집행과 야만적인 처벌이 인류의 역사 도처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알려줍니다. 이슬람 국가(IS)의 행위들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우리 각자의 역사에도 이런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 희극이 공연되던 1604년 당시에도 이미 사람들은 간음죄로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 야만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판결에 대한 반감이 바로 이 희극에 긴장감을 주는 요소이며 이사벨라의 호소에 우리가 동참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희극은 내가 말하는 도덕적 진보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폭력의 폭력에 대한 승리를 보는 것입니다. 안젤로는 그 선고를 결국 실행하지 못합니다.

위의 단락은 인간이 가진 도덕성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해럴드 블룸의 책 “셰익스피어: 인간의 발명”에서 이 책의 부제는 비록 약간의 과장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셰익스피어가 가장 위대한 심리학자들 중의 한 명임을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이사벨라는 두 종류의 정의, 곧 이상적이고 성스러운 정의와 언제나 모순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정의를 비교합니다. 이사벨라는 인간이 스스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무의미하고 잔인한 행동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위의 인용 바로 앞에는 쥬피터가 범죄자에게 내리는 가장 최악의 형벌이 묘사됩니다.

“자비로운 하늘이여,
당신은 날카롭고 지옥불같은 번개를
부드러운 관목이 아니라
비뚤어지고 도끼가 들지 않는 오크 나무에만 사용하지만: 그러나 인간이여, 거만한 인간이여…

처벌은 죄의 정도에 비례해야 합니다. 신들은 번개를 부드러운 관목에 사용하지 않고 비뚤어진 오크 나무에만 사용합니다. 그러나 “거만한 인간”은 쥬피터보다 더 잔인합니다. 나는 “하찮고 덧없는 권위로 감싼(drest in a little brief authority)” 부분에서 셰익스피어가 단지 안젤로가 공작이 자리를 비운 사이의 임시 통치자라는 사실만을 나타내려 한 것이 아니라, 아무리 우리가 자신을 현명한 리더로 포장한다 하더라도 결국 모든 인간의 권위는 그저 부수적이며 무상한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통치자의 권위는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며 우리의 정의에 대한 본능은 변덕스럽고 우연한 것입니다.

더 나쁜 것은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 매우 미숙하다는 점입니다. 셰익스피어는 단 일곱 단어를 이용해 이 현대심리학이 밝혀낸 사실을 요약합니다. “가장 확신하는 것에 대해 가장 무지하니(most ignorant of what he’s most assured).” 수많은 사회심리학 및 인지심리학의 실험들은 인간이 가진 자신의 지식, 지혜, 판단에 대한 무모한 과신을 잘 보여줍니다. 모든 이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어리석고, 완고하고, 무지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일관되게 자신의 지식을 과대평가하며 자신의 예측이 가지는 정확성을 틀리게 예상합니다. 이런 인간의 오만함은 바로 셰익스피어와 현대 심리학을 잇는 공통된 주제입니다.

놀라운 점은 셰익스피어가 이런 인간의 단점을 우리의 진화적 조상과 연결시켰다는 점입니다. “화난 원숭이처럼(like an angry ape)”이라는 말로 그는 다윈보다 250년 먼저 우리의 생물학적 사촌과 우리를 비교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충동성과 어리석음에 대해 얼마나 적절한 비유인지요! 우리는 인간의 감정을 포장하고 그 이유를 찾으며 여기에 어떤 위엄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화난 원숭이라는 표현을 통해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분노가 유치하고 희극적이며 그저 원숭이가 가진 것과 같은 제한된 이해의 결과일 뿐임을 말해줍니다. 다음 구절인 “너무나 터무니없는 술책들을 저질러(plays such fantastic tricks before high heaven)”는 바로 이런 인간의 행동이 가진 어리석음을 알려줍니다. “술책”이란 유치하고 단순한 무엇을 말합니다. 인간의 지혜와 정의에 대한 허술한 추구와 보잘것 없는 능력은 더 현명하고 초월적인 구경꾼들에게는 그저 우스꽝스럽게만 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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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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