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주제의 글
  • 2015년 1월 15일. 파리에 모인 세계 지도자들의 언행 불일치

    세계 각 국의 지도자들이 샤를리 엡도 공격을 규탄했고, 몇몇은 파리에서 열린 집회에 직접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자국에서도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고 테러에 강력대응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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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년 4월 30일. 이집트 무더기 사형선고, 700여명의 운명은?

    이집트 법정이 무슬림형제단 지지자 683명에게 무더기 사형선고를 내리고, 기존에 사형선고를 받은 529명 중 37명의 형도 확정했습니다. 작년 여름, 모르시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의 진압을 받은 후 경찰서와 교회 등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입건되었던 사건입니다. 피고 사건을 모니터링해온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의 관계자는 이번 재판이 공정한 재판의 기본적인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며, 이집트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말살시켰다고 평가했습니다. 법원 건물 밖에서 만난 한 남성은 자신의 친척 5명이 이번에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더 보기

  • 2014년 4월 24일. 민주주의는 아랍 국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아랍의 봄’ 이후 민주주의가 그나마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는 나라는 아랍 22개국 중 튀니지 한 곳 뿐입니다. ‘아랍의 봄’이 없었다면 차라리 더 나았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랬다면 리비아, 예멘, 바레인, 시리아, 이집트에서 성난 사람들이 민주주의라는 이름 하에 난동을 일으키는 사태도 없었을 것이고 호스니 무바라크 같은 친서방적 인물이 물러나는 일도 없었을 거라면서요. 이들은 조용히 이제라도 이집트가 군부의 손아귀로 돌아갔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면서, 아랍 세계에 민주주의란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고 속삭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의견에는 더 보기

  • 2014년 2월 19일. 깊어가는 이집트의 세대 간 갈등

    이집트의 세대 갈등이 날로 깊어가고 있습니다. 무바라크 대통령과 모르시 대통령의 하야 당시 중요한 역할을 했던 35세의 정치홍보 전문가인 가잘리 하브는 젊은 층을 포섭하고자 하고자하는 정부로부터 도움을 요청받았지만, 정부 회의에 세 번 참석한 후 마음을 접었습니다. 정부가 여전히 젊은이들을 떼로 체포하고, 열악한 교도소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는 인구의 4분의 3이 40세 미만인 젊은 국가입니다. 가잘리 하브를 비롯한 많은 이집트의 청년들은 현재 이집트 정부의 강경한 행태가 더 보기

  • 2013년 12월 4일. 이집트 최초 여성 래퍼의 세상을 향한 메시지

    이집트 최초로 베일을 쓴 여성 래퍼가 탄생했습니다. 지난 10월, 중동 전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 <아랍스 갓 탤런트(Arabs Got Talent)>에 출연해 랩 음악을 선보인 18세의 마얌 마흐무드(Mayam Mahmoud)가 그 주인공입니다. 카이로의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는 마흐무드는 방송 출연 후 큰 화제가 되어, 대학 캠퍼스에서도 다섯 차례의 공연을 열었습니다. 여성 래퍼는커녕, 남성 래퍼조차 찾아보기 힘든 이집트에서는 무척 드문 일입니다. “여자가 드문 직종에서 일하는 것,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 일터에서 남편보다 높은 더 보기

  • 2013년 11월 27일. 집회의 자유를 박탈하려는 이집트 군부정권

    지난 일요일, 이집트의 군부정권은 시위에 관한 새로운 법률을 공포했습니다. 사전 승인을 받지 않은 대규모 시위 참여자들에게 형량을 부과하거나 무거운 벌금을 내리는 방식으로 집회 활동을 범죄로 규정하여 규제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확고히 밝힌 것인데요. 대규모의 공공 집회가 전 이집트 대통령을 두차례나 연속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그 동안의 정치 상황을 고려해볼 때, 지난 7월 새롭게 들어선 이집트 군부정권이 정권에 불리한 집회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목적으로 규제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더 보기

  • 2013년 10월 2일. 트위터를 활용한 이집트의 정치 현상 분석

    트위터로 이집트의 정치 현상을 어디까지 파악할 수 있을까요? 소셜미디어에서 대량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비교적 수월하고, 특히 트위터가 이집트 혁명에서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현재 이집트에서는 트위터를 활용한 학제간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 예로 2012년에 나온 토드 모스탁(Todd Mostak)의 석사 논문을 꼽을 수 있습니다. 모스탁의 논문은 위치가 표시된 트윗 2500만개를 분석해 무슬림형제단이 실제로 카이로의 빈곤층 거주지역에서 활발한 모집 활동을 펼쳤는지 확인하고, 정치적 이슬람주의가 과연 가난한 자들의 이데올로기인가를 살펴본 연구였습니다.  이슬람주의에 더 보기

  • 2013년 9월 10일. 혼란 속 이집트, 스파이로 오인돼 잡혔던 황새의 죽음

    메네스(Menes). 지난주 이집트 남부의 작은 마을에서 발견된 뒤 “서방 세계가 보낸 스파이” 혐의로 이집트 경찰이 잡아들인 황새의 이름입니다. 메네스를 처음 발견한 어부는 다른 새들과 달리 몸에 무언가 전자 장치가 부착돼 있는 것을 보고 의심스러워 황새를 잡아 경찰에 넘겼습니다. 문제의 전자 장치는 이내 프랑스의 조류학자들이 철새인 황새의 이동경로를 연구하기 위해 부착한 위치추적장치였고, 프랑스 국경을 넘는 순간 작동이 중지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장기집권이 시민들의 민주화 시위 속에 막을 내리고, 이후 집권한 더 보기

  • 2013년 8월 20일. 혼란 속 이집트, 정부와 언론의 결탁

    이집트 군부는 모르시 대통령을 몰아낸 날, 모르시 대통령을 지지하는 TV 방송국을 모두 폐쇄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지난 4일에 걸쳐 알자지라 방송의 이집트 지부를 폐쇄하고, 알자지라 특파원을 살인 및 종파간 분쟁을 선동한 혐의로 기소해버렸습니다. 정부 관계자는 기자회견을 통해 “폭력적인 테러리스트에 대한 전쟁”을 왜곡해 묘사하고 있는 외신을 여러 차례 비난했습니다. 이에 따라 외신 기자들이 실제로 공격받고 구금되는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학계와 인권운동계에서는 현재의 혼란 속에서 국가와 이집트 국내 언론이 결탁하는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군인들이 더 보기

  • 2013년 7월 26일. 쿠데타를 쿠데타라 부르지 못하고…

    이집트에서 군부가 모르시 대통령을 몰아냈을 때, 미국이 과연 16억달러에 달하는 대 이집트 원조를 중단할 것인가 지켜본 이들이 많았을 겁니다. 1961년 제정된 해외원조법(Foreign Assistance Act)에 따라 미국 정부는 선출된 정부가 군부의 쿠데타로 물러난 국가에는 직접적인 원조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백악관 대변인 제이 카니가 쿠데타를 쿠데타라 부르지 못하고 말을 돌려하느라 진땀빼는 모습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봤습니다. 1961년 이래 군사 쿠데타가 발생한 국가는 몇 군데고, 미국이 원조를 중단한 경우는 몇 건일까요? 정답은 ‘아주 많다’와 ‘한 두 건’입니다. 리스트는 아래와 같습니다. -1961년 5월 한국. 박정희 주도 하에 군부가 장면 정부를 몰아내고 집권. 냉전이 한창이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당연히 케네디 정부는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중단하지 않음. 다소 궁색한 변명이기는 하지만, 해외원조법이 발효되기 전에 쿠데타가 일어난 경우라 봐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음. -1963년 남베트남에서 군부가 응오딘지엠 정부를 몰아냄.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엄청나게 늘어남. 응오딘지엠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던 선거 자체가 부정선거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미국이 원조를 늘이면서 그 이유를 대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 -1967년 그리스에서 군부가 선거 전 임시로 구성된 과도 정부를 몰아내고 집권. 미국은 군 중장비 지원을 잠깐 중단했다가,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 다음 해에 지원을 재개했고, 1970년에 다시 중단했다. 1971년 의회는 별도의 법안을 통과시켜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회복될 때까지 지원을 중단하려 했으나, 행정부가 예외 조항을 통해 계속 지원함. -1973년 칠레군부가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을 몰아냄. 미국의 군사 지원은 오히려 증가. -1977년 무하메드 지아 알하크 장군이 부토 대통령을 몰아냄. 미국의 군사 지원은 계속됨. 1979년 카터 대통령이 지원 규모를 줄였으나, 쿠데타 때문이 아니라 CIA가 발견한 핵농축 프로그램이 이유였음. 그러나 얼마 후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하자 미국은 다시 지원을 늘이기로 했는데 당시 카터가 4억 달러를 제시하자, 지아 장군이 이를 “땅콩”이라 표현하며 거절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음. -1979년 엘살바도르의 좌파 성향 군부가 (부정)선거로 당선된 카를로스 움베르토 로메로 정권을 몰아냄. 이후 우파 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 당시 엘살바도르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오히려 늘어남. -1980년 정당하게 선출된 라이베리아의 대통령이 쿠데타로 축출됨. 대통령이 냉전에서 중립을 표방한데 비해, 새로 들어선 군부는 서방의 편에 서겠다고 선언해 미국의 지원이 오히려 늘어남. -2006년 태국 군부가 탁신 시나와트라 대통령을 몰아냄. 미국은 다음 선거가 치러지기까지 2년 간 군사적 지원을 중단했으나,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프로그램 쪽으로는 지원이 중단없이 계속 되었음. 이 정도만 보아도 미국이 해외원조법을 제대로 적용된 사례가 거의 없다는 점은 충분히 드러납니다. 물론 1961년에 미국이 한국을 포기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1979년 이란 혁명과 소련의 위협 앞에서 파키스탄도 마찬가지였겠죠. 마찬가지로 현재 이집트 지원을 계속할 명분도 분명히 있습니다. 지원을 끊었다가는 군부는 물론 진보적 세속주의자들도 고립될 것이고, 지원을 끊는다고 해서 무슬림형제단과의 관계가 좋아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미국이 외교적, 지리전략적 고려 없이 법만을 따른 사례는 드뭅니다. 그나마 놀라운 사실은 이번 정부가 이 점을 의식하고 “쿠데타”라는 단어를 직접 거론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Economist) 원문보기

  • 2013년 7월 9일. 모르시의 몰락과 이집트 민주주의의 미래

    1년 전 모르시가 이집트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을 때, 이코노미스트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매체로서, 정치를 종교에 종속시키고 여성과 소수자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슬람형제단에 동의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르시가 52%의 표를 얻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어쨌거나 이집트에서 30년 간의 독재가 막을 내렸다는 사실에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지난 며칠 간의 상황이 더욱 절망적입니다. 군과 거리 시위에 의해 물러난 모르시 대통령의 사례는 이 지역에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습니다. 모르시 정권이 몰락한데는 더 보기

  • 2013년 4월 23일. 활동가의 죽음으로 촉발된 이집트 경찰개혁 요구, 실현 가능성은?

    지난 1월 TV와 트위터 상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발언을 한 후 노상에서 상처를 입고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가 사망한 20대 활동가 모하메드 엘 긴디(Mohamed el-Gindy)는 여전히 이집트 경찰 개혁 요구의 중심에 있습니다. 긴디의 죽음은 경찰의 가혹행위와 정치적 보복, 당국에 의한 사건 은폐, 새로 들어선 무슬림형제단 정부와 기존 보안군 간의 담합 등 이집트의 현 지도부가 풀고 해명해야 할 문제의 종합 선물세트와도 같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모르시 대통령은 현재의 혼란한 정국 속에서 당장 길거리의 혼란을 진정시키는데 필수적인 경찰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단계적”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