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직업, 결혼… 행복한 삶에 정답이 있을까? (4/5)
2019년 3월 21일  |  By:   |  문화, 칼럼  |  No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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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에 관한 ‘담론의 덫’은 어떤 직업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느냐뿐 아니라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까지 규정하려 듭니다. 정답은 꽤 간단합니다. 할 수 있는 한 다른 것을 희생하면서 더 열심히, 더 많이 일해서 돈을 더 많이 벌어야 성공한 삶이라는 거죠. 실제로 사람들은 소득이 오를수록 일을 더 하면 추가로 벌 수 있는 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우리가 쓸 수 있는 시간을 점점 더 돈과 결부해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시간을 돈으로 환산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여가 활동을 통해 얻는 즐거움이 줄어드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마음을 비우고 재충전해야 할 시간에 ‘이 시간에 일을 했으면 얼마를 더 벌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사로잡힌다면 그럴 만도 합니다. 또 이런 경향이 사실이라면 소득이 높은 사람이 전체 사회의 평균 정도를 버는 사람보다 매일 행복을 덜 느끼리라는 것도 어렵지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쓸 수 있는 모든 시간을 돈을 더 벌기 위해 일하는 데 쓴다면 행복을 찾을 여유는 없을 테니까요.

미국 시간 활용 조사(American Time Use Survey)를 다시 한번 살펴봅시다. 일주일에 21~30시간 일하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며 뚜렷한 목표 의식을 가지고 삶을 살았습니다. 만족도가 높았죠. 30시간이 넘어가면 일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불행해졌습니다. 이 결과는 성별에 관계없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많이 일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긴 시간을 일하면서도 크게 힘들어하지 않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기는 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너무 좋고 만족한 나머지 자발적으로 더 많이 일하는 사람도 있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특히 제가 쓰고 싶던 책을 쓸 때는 하루에 몇 시간을 들여도 전혀 힘들지 않았고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제 동료 연구자들도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사회 전체를 놓고 보면 흔하지 않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제가 운이 좋아 이런 일을 하게 된 거라고 하는 편이 솔직할 겁니다.

대부분 사람이 일을 더 많이 하기로 선택하는 이유의 근저에 또다시 담론의 덫이 등장합니다. 가능한 한 오래 일해서 돈을 더 벌어야 성공한다는 명제가 꽤 설득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야근과 밥도 제때 못 먹는데 밥먹듯이 반복되는 초과 근무는 그 시간에 일을 해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과 보람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든 직장에서 살아남고 더 좋은 자리로 승진하기 위한 ‘자발적인 선택’일 때가 많습니다. 수많은 업종, 직군에서 야근이 당연시되고 오래 일하는 것이 미덕이 됐습니다. 금융, 광고회사, 법조인, 교육을 비롯한 공공 부문, 게다가 초과근무 수당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예술계에서도 이런 일이 수시로 일어납니다. 제일 먼저 출근해서 제일 늦게 퇴근하는 것이 성실함의 표본이자 미덕으로 칭송받는 문화에서 사람들은 잠을 줄이고, 건강을 해쳐가며 일터에 자기자신을 옭아매게 됩니다.

지난해 저는 채널5의 <Make Or Break?>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됐습니다. 하루에 보통 16시간 정도 촬영이 계속되는 강행군이 일주일에 엿새 꼴로 4주 동안 이어졌습니다. 고작 한 달 남짓한 시간이었고, TV 프로그램 진행자보다 몇 배는 힘들게 일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든지 많다는 걸 모르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더위를 특히 못 견디는 제가 멕시코의 뜨거운 여름날에 에어컨도 잘 안 나오는 차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하루에 4시간씩 오가며 촬영 순서를 기다리는 일은 정말 고역이었습니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습니다. “원래 방송국 일이 다 이렇게 힘들고 시간 대중이 없으니”, 그걸 훈장이라면 훈장으로 여기고 일하자는 자세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측면이 분명 있겠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을 일만 하다 보면 생산성도 떨어질 테고, 무엇보다 개개인의 행복은 내팽개치게 되리라는 생각에 안타까웠지만, 현장에서는 이의를 제기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랑과 결혼에 관한 ‘담론의 덫’을 살펴보겠습니다. 담론의 덫은 그야말로 없는 곳이 없으니 당연히 처음부터 끝까지 지극히 개인의 선택이 되어야 할 사랑, 결혼, 가족에 관해서도 수많은 정답과 오답이 범람합니다. 어렸을 때 읽던 동화책의 결말을 먼저 생각해볼까요? 동화의 내용은 달라도 결론은 대부분 하나같이 이런 식이었을 겁니다.

그 후로 둘은 사랑에 빠져 결혼해 자식도 많이 낳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사랑에 빠져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도 충분한 해피엔딩일 텐데 굳이 결혼, 자식을 끼워넣었습니다. 동화책에나 나오는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어른이 된 우리의 머릿속에도 저 문장이 너무 강렬하게 남아있어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삶을 이상적인 삶으로 여기고 있으며, 이 제도와 규범을 다른 이에게도 거리낌없이 투영합니다. “마흔 살’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결혼을 ‘못 하고’ 있다니 참으로 딱하다”는 생각, “아직 인연을 못 만난 거겠지, 곧 좋은 사람 만날 거야”라는 말은 아무리 진심으로 상대방을 위하는 말이었더라도 심하면 상대방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는 대표적인 담론의 덫입니다. 누구나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고, 결혼을 해야만 좋은 삶을 산다는 규범 따위는 애초에 없기 때문이죠. 짚신은 두 발에 신어야 하니 짝이 필요하겠지만,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엄밀히 따져보면 누구나 원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축복받은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가정 자체가 지나치게 낙관적입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부부도 많지만, 그렇지 못하고 중간에 종결되는 결혼 생활도 대단히 많습니다. 영국의 경우 결혼한 부부 다섯 쌍 가운데 두 쌍이 이혼합니다. 현실이 이런데도 평생의 인연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결혼생활이라는 이상만 좇자고 외치는 건 모순이고 가식입니다. 결혼에 관한 담론의 덫에 빠져 우리는 불같은 사랑으로 시작한 결혼에 즐거운 일만 가득하리라 기대합니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이죠. 상대방을 향한 사랑은 영원히 식지 않으리라 기대합니다. 맹세까지 하죠. 현실은? 결혼한 지 1년 정도 지나면 부부가 됐을 때의 불같은 사랑은 대체로 식습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물론 아니지만, 사랑의 온도가 상온으로 내려온다는 뜻이죠. 평생의 동반자가 된 만큼 내가 필요한 건 뭐든 상대방이 다 채워주고 해결해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나도 배우자가 원하는 모든 걸 맞춰줄 수 있나요? 세상에 그렇게 전지전능한 사람은 없습니다. 심리치료사 에스더 페럴은 이런 허상 가득한 결혼에 관한 담론의 덫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돌직구를 날렸죠.

“수많은 부부관계가 삐그덕대는 결정적인 이유가 부부관계는 이래야 한다, 저래선 안 된다는 식의 온갖 규범과 규정들 때문이라는 걸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가디언, Paul Do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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