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을 인종차별이라 부르지 못하는 미국 언론
2019년 3월 4일  |  By:   |  문화, 세계, 정치  |  No Comment

1964년, “뉴요커”는 애리조나 주 상원의원인 배리 골드워터의 대선 캠프에 리처드 로비어 기자를 파견했습니다. 당시 골드워터 후보 캠페인의 골자는 주정부에 대한 연방정부의 개입이 과도하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일부 지지자들은 후보가 대놓고 말하지 못하던 “진짜” 메시지를 세상에 알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골드워터가 말하는 “지역의 일”, “주정부의 일”이란 연방정부가 시행 중인 시민권 강화 조치에 맞서 백인 우월주의적 현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요.

당시 로비어 기자가 썼던 글들을 읽어보면, 그는 남부 백인 지지자들 사이의 이러한 정서를 묘사하는데 거리낌이 전혀 없습니다.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충격적일 정도죠. 그는 골드워터 캠프를 “인종주의적 운동”이라고 명명하면서, “가장 뻔뻔한 부류의 인종차별의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썼습니다. 그가 백악관 입성에 필요한 “인종주의자들의 귀에 거슬릴 말은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고도 썻죠. 골드워터가 눈짓이나 끄덕임, 말의 뉘앙스 정도로 표현했어도 로비어는 그것에 확실한 라벨을 붙였습니다.

오늘날 언론 보도에서 이 같은 현상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비백인 편집자들이 운영하고 타겟 독자층이 명백한 소수 보도 매체를 제외하면, 주류 언론사들은 “인종주의적(racist)”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일이 좀처럼 없습니다. 에둘러 말하기 위한 유사 표현 – 인종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인종적 동기를 가진, 인종적으로 몰이해한(racially charged, racially motivated, racially insensitive) 등 – 만 끝도 없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NBC 보도국 데스크가 자사 기자들에게 아이오와 주 스티브 킹 의원에 성명에 대한 보도를 할 때 “인종주의”라는 표현을 쓰지 말 것을 권고하는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이 지침은 “많은 이들이 인종주의라고 비난하는”과 같은 표현은 괜찮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죠. 이 이메일이 공개되자 소셜미디어에서는 비난이 잇따랐고, NBC 측은 재빨리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논란에 휩싸인 건 NBC가 처음이 아닙니다. 뉴욕타임스 역시 지난 가을 킹 의원의 발언을 “인종적인 색채를 띤 발언들(racially tinged remarks)”의 일환이라고 소개했다가 홍역을 치렀죠.

코넬대 역사학과 로렌스 글릭먼은 작년 가을 “보스턴 리뷰”를 통해, 이와 같은 태도는 오직 인종과 관련된 논란에서만 나타난다고 밝혔습니다. 대선 당시 힐러리 캠프에 대한 트럼프의 공격을 놓고“젠더적 색채를 띤 공격”이라는 표현이 매우 드물게 등장한 예는 있었지만, 반유대주의를 “종교적 색채를 띤”과 같은 표현으로 에둘러 표현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죠. 뉴스 헤드라인에 “인종주의자”라는 단어를 대놓고 사용했던 때도 있지만, 이러한 경향은 5,60년대 들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우선 완강한 분리주의자인 스트롬 서몬드 같은 정치인들이 노골적인 인종주의적 색채를 버리기 시작합니다. 이는 민권 운동의 성과로서, 인종차별이 도덕적인 공격을 받게 된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인종차별주의자로 인식되는 것이 곧 일종의 악마로 인식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포스트 민권 운동 시대의 강력한 규범들이 인종주의의 종말을 불러온 것은 아니지만, “인종주의자”라는 딱지가 정치적, 사회적인 위험 요인이 된 것이죠. 이 터부가 어찌나 강력해졌던지, 팻말을 들고 집회에 참여하는 백인우월주의자들조차도 면전에서 인종주의자로 불리면 발끈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많은 미국인들이 인종주의를 개인적인 차원의 결함이자 마음의 병으로 인식하게 되었죠. 언론인들 역시 이 단어를 쓰면 그 대상이 되는 인물이나 행동이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과 같다고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대상에게 대단한 혐의를 씌우는 이 단어는 기사에 쓰이더라도 인용하는 한에서, 아니면 논설이나 칼럼에만 쓰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객관성과 검증가능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언론인들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특히 사람 속은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심지어는 편견을 전시하는 본인마저도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는 이유로 아무리 많은 사례가 쌓여도 특정인의 행동에 어떠한 딱지를 붙이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여러 언론사의 데스크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기록된 거짓말들을 “거짓말”로 명확히 지칭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죠.

백인이 더 우월하다는 주장을 꾸준히 해온 스티브 킹 의원의 역사가 “인종적인 색채를 띈” 것이라면 “인종차별”, “인종주의자”라는 명명은 도대체 어느 선부터 가능한 것일까요? 뉴스에서 인종주의를 다루는 방식이 추상적으로 변한 것은 놀랍지 않습니다. 인종차별에 대한 경험 자체가 추상적일 수 밖에 없는 백인들의 기분을 중심에 둔 관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종주의를 권력의 부당한 배치와 이로 인한 결과로 이해하는 사람에게 있어, 백인 우월주의를 기반에 두고 세워진 나라에서 인종주의를 애매하게 보도하는 태도는 언론의 책임 유기, 나아가 일종의 가스라이팅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인종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전혀 다른 시각은 기사 하나를 완전히 바꿔버릴 수 있습니다. “경찰 활동이 인종차별적이다”라는 문장을 보고 독자는 경찰관 개개인이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니면 경찰의 업무가 흑인과 라틴계 시민들에게만 특정한 결과를 가져오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이해해야 할까요? 경찰의 불시 검문을 일상적으로 당하는 사람에게는 이 문장이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주류 언론 매체의 데스크에서 인종주의가 “개인의 영혼이 작동하는 방식”이라는 입장과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이라는 입장이 계속해서 마찰을 빚게 되면, 비백인 인구가 점차 증가하고 있는 사회에서 이는 심각한 신뢰성의 위기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진작에 찾아왔어야 할 위기입니다. (NP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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