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흑인 여성들이 “미투 운동”에 참여하기 어려운 이유
2017년 12월 18일  |  By:   |  세계, 칼럼  |  1 comment
  • 노스햄프턴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형법을 가르치는 강사이자, 작가, 사회 운동가인 Shanita Hubbard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어느 동네에나 그런 길모퉁이가 하나쯤은 있습니다.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권력과 인종주의와 성차별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그런 장소 말이죠.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에도 그런 곳이 있었습니다.

길 한구석에 둘러서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누가 최고의 래퍼인지에 대한 논쟁을 벌이던 동네 사내들은 어린 여자아이가 지나가는 순간 갑자기 포식자로 돌변합니다. 등하굣길에 그런 모퉁이를 피할 수 없었던 저 같은 아이들은 그곳에서 몸을 움츠리고 입을 닫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죠.

세계 어느 곳에나 그런 길모퉁이가 있을 겁니다. 내 몸이 위험에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장소 말이죠. 나보다 적어도 열다섯 살은 많을 것 같은 남성들이 나와 친구를 쳐다보며 12살 난 어린아이의 몸에 무슨 짓을 할 것인지를 경쟁이라도 하듯 악을 쓰고 외쳐대는 그런 길모퉁이를 지나게 되더라도, 입만 다물면 고통의 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적어도 운이 좋은 날에는요.

하지만 혼자 그곳을 지나가거나 하는 날에는 순식간에 상황이 악화되기도 합니다. 무리 중 한 명이 내 엉덩이에 손을 갖다 대면 나는 눈치채지 못한 척하면서 걸음을 재촉합니다. 저항해봤자 상황은 더 나빠질 테니까요. 그는 내게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거나, 집까지 따라올지도 모릅니다. 눈에 보이는 가게에 들어가 제풀에 지친 사내들이 사라질 때까지 몸을 숨겨야 할 때도 있죠. 하지만 이런 길을 매일매일 지나다니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이 모든 것이 평범한 일상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이와 같은 폭력의 일상화는 여러 가지 형태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힙합 음악 제작자인 러셀 시몬스나 토크쇼 호스트인 태비스 스마일리와 같은 거물들의 성추행 혐의에 흑인 커뮤니티가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아직은 분명치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 하비 와인스타인에 대한 성추행 혐의가 제기되었을 때 유명 인사들의 공개적인 피해자 지지 성명이 줄을 이었던 것과는 여러모로 대비되는 상황이죠. 분명한 것은 많은 이들이 지금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볼 때나, 알 켈리의 콘서트에 갈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구실을 찾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우리 다수에게 있어 이런 부류의 인지 부조화는 매우 어렸을 때 형성된 것이기도 합니다.

매일같이 위험천만한 거리를 지나다녀야 했던 어린 시절을 보내며 저는 가해자가 대단한 힘을 가진 사람일 때만이 내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길모퉁이에 서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사내들은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권력자와는 거리가 먼 인간들이었죠. 그들 역시 힘을 가진 사람들의 먹잇감이었습니다. 경찰차로 거리를 순찰하며 언제고 이들을 감옥에 집어넣을 수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운이 좋은 날도 있었을 겁니다. 입을 닫고 저항하지 않으면 욕을 먹거나 몇 대 얻어맞는 정도로 상황이 종료되기도 했죠. 하지만 경찰들과의 충돌이 크게 번지고, 그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날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경찰에 의한 국가 폭력에 동네 사람들은 청년들을 보호하기 위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찰 폭력에 맞서는 것은 시민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경찰 폭력의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돕고 지역구 정치인들에게 압력을 넣어야죠.

하지만 커뮤니티 전체가 내 삶을 공포로 몰아넣는 사람들을 보호하자고 나설 때, 저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찰 폭력에 맞서 싸우는 동네 사람 중에는 저와 똑같이 매일매일 오늘도 길에서 성추행범들의 눈에 띄지 않기만을 빌며 살아온 여성들도 있었죠. 그런 모습을 보면 나의 고통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나를 억압하는 바로 그 가해자도 억압을 받고 있으니, 그들을 보호하는 데 우선 힘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어쨌거나 그들은 말 그대로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으니까요.

“미투” 해시태그 운동을 보며 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지난 20년간, 우리 커뮤니티에는 더 크고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나 자신을 달래면서 묻어둔 기억들이죠.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가운데 강간을 당하고도 신고하는 이는 15명 중 1명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에는 이런 배경이 깔려있을지도 모릅니다. 백인 남성들이 우리 커뮤니티를 휘젓고 다니며 무시무시한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면서, 가해자가 흑인인 범죄에 대해서는 “나중에”를 되뇌며 살아왔으니까요.

힙합계에서 더 많은 성범죄 피해자가 나서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겁니다. 힙합계에도 나의 고통이 우선순위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피해 사실을 밝히지 않고 침묵하는 여성들이 있지 않을까요?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저는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교차로에 서 있는 흑인 여성들은 미투 운동이 미국 전역을 뒤흔드는 지금도 그 열풍에 쉽게 동참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나고 자란 커뮤니티에서조차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기억 때문입니다. 인종과 계급, 성과 권력의 문제가 모두 교차하는 이 지점은 매우 위험한 곳입니다. 그리고 가장 취약한 여성들은 그 길을 홀로 걸어야 하죠. 그들은 피해를 보고도 자신의 가해자를 위한 구명 운동에 나서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고통을 준 가해자 위에 더 힘센 포식자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요. 이들의 얼굴은 결코 타임지 표지에 실리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가졌던 종류의 인지 부조화가 그대로 남아 평생 입을 열지 않을 피해자들도 있을 거고요. (뉴욕타임스)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