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권력
2017년 10월 27일  |  By:   |  세계  |  2 Comments

“제가 자란 1960년대와 70년대는 지금과는 분위기가 아주 달랐습니다. 행동 규범, 직장 생활 등 모든 게 달랐어요.”

할리우드 거물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을 둘러싼 성추행 스캔들은 이달 초 뉴욕타임스와 뉴요커의 보도로 시작됐습니다. 이후 수많은 피해 여성의 폭로가 잇따르며 성 추문이 일파만파 퍼지자 와인스틴은 위와 같이 진술했습니다. 와인스틴의 대변인은 그를 “새로운 방식에 적응해 가고 있는 늙은 공룡”에 비유했고, 와인스틴은 현재 섹스 중독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저 여자를 너무 좋아하는 옛날 사람이라고요? 늙고 교활한 불량배 같아도 여성을 위해 언제나 문을 열어 주는 매너남이라고요? 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와인스틴이 저지른 행동은 그 어떤 이유로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업무 회의차 방문한 여성을 벌거벗은 상태에서 목욕 가운만 걸친 채로 맞이한다는 것은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행동입니다. 피해 여성들에 따르면 와인스틴은 자신의 제의를 거절할 경우 향후 커리어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 협박까지 일삼았습니다. 와인스틴은 현재 강간 혐의까지 받고 있으며, 미국과 영국 경찰이 공동으로 성범죄 혐의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입니다.

사실 와인스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직장 문화와 행동 규범이 실제로 많이 변했으니까요. 와인스틴이 18살이 되던 1970년에는 회사에서 남성들이 여성들을 곁눈질로 쳐다보고 은근슬쩍 스킨십을 시도하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1980년에 하버드비즈니스리뷰가 직장 내 성희롱에 관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남성 응답자의 3분의 2는 직장 내 성희롱이 “심각하게 과장되었다”고 답했고, “과대 망상하는 여성들과 선정적인 기삿거리를 원하는 기자들”이 만들어 낸 작품이라며 별 것 아닌 일로 치부했습니다. 1989년 한 미국 판사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동전을 꺼내 달라는 직장 상사의 요구가 불쾌할 수는 있어도 “이성적인 여성”이라면 크게 스트레스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판결 내렸습니다.

이제 이렇게 덮어놓고 현실을 부정하는 경우는 드물죠. 고용 기회, 승진 등을 대가로 하는 성적 요구가 성범죄에 해당한다는 것은 대부분 남성과 여성이 동의하는 사실입니다. 손으로 만지는 등의 신체적 접촉도 명백한 성범죄입니다. 하지만 충격적이게도 여전히 수많은 남성은 자신의 성적 발언이나 음란한 농담으로 인해 적대적인 근무환경이 조성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부유한 국가에서는 직장 내 성희롱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여성의 절반 이상과 남성 10명 중 1명은 성희롱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고소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가난한 국가의 경우 상황은 더 열악합니다. 당장 먹여 살려야 하는 자녀가 있는 여성이 상사의 성희롱 때문에 일을 그만두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업종을 불문하고 직장 내 성범죄가 만연합니다.

문제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먹잇감을 노리는 남성들은 자신의 권력을 악용하고, 마땅히 처벌돼야 하는 악행은 아무런 제재 없이 계속되고, 눈먼 장님 행세를 하는 목격자들과 자신의 커리어에 해가 될까 두려워 고발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만약 회사들이 정말로 직장 내 성범죄를 근절하고 싶다면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해결해야 합니다.

와인스틴의 성범죄 파문은 그 정도가 유례없이 심하다뿐이지 우리에게는 이미 낯선 현상이 아닙니다. 할리우드 권력의 중심은 거물급 제작자 및 감독들입니다. 대본을 가져다 블록버스터를 척척 찍어내는 능력 덕분에 어렵지 않게 추종자들을 범죄에 가담시킬 수 있죠. 그리고 기회를 잡기 위해 필사적인 무명 배우들은 좋은 먹잇감이 됩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투자자들과 경영진이 수십억짜리 아이디어를 가진 이들의 악행을 눈감아 주곤 합니다. 대학에서는 유명한 교수들이 연구비를 많이 끌어올 뿐 아니라 대학의 세계 랭킹 상승에도 일조합니다. 이들이 써주는 추천서 한 장이 일자리를 얻는 데 혈안이 돼 있는 대학원생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습니다. 워싱턴이나 웨스트민스터에서 커리어를 시작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인턴십 기회나 스태프 직은 정치인들이 모두 쥐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정치인들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유권자들은 정작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치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모를뿐더러 관심도 잘 없는 경우가 많죠.

생산직에 종사하는 여성들 또한 성범죄의 희생양입니다. 호텔 청소부나 웨이트리스가 손님에게 성추행을 당했을 때 상사는 고객을 잃는 것과 침묵 사이에서 후자를 택합니다. 현지 공급업체들에 공장을 안전하게 관리하고 노동 기준을 준수하라고 강조하는 다국적 기업들조차 성범죄에서는 대부분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피해자들은 우울증과 분노, 수치심으로 고통받습니다. 성범죄가 일어나는 회사들도 결국 그 죗값을 치르게 됩니다. 와인스틴의 스튜디오는 고소당할 가능성이 크고, 이번 성 추문으로 인해 결국 회사가 문을 닫을 수도 있습니다. 도덕적 요인을 완전히 배제하고 비즈니스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직장 내 성범죄는 회사에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직장 내 성범죄를 좌시하는 회사는 능력 있는 여성 인재를 경쟁사에 빼앗길 것이고, 결국 시장의 심판을 받게 되겠죠. 잘못을 바로잡고 올바른 사내 문화를 정립하는 것은 작은 비용으로 큰 이익을 얻는 길입니다. 물론,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려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마구 권력을 휘두르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되죠. 각 회사는 익명성이 보장되는 사내 환경 설문조사를 하여 성범죄 발생 여부를 확인하고 조기에 발견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고발 절차는 쉽고 간단해야 합니다. 접수된 고발 건은 신속하게 처리하되 사건의 심각성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불쾌한 언행이나 신체 접촉의 경우 행위자에게 경고를 내리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심각한 성범죄 사건은 법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영국 고용재판소는 사건 발생 3개월 후에야 고소를 접수한 여성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고소 여성이 가해자와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이 주장의 신뢰성을 떨어뜨린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고발이 늦었거나 직장에서 계속해서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고 해서 피해자가 거짓말을 한다고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보복을 두려워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해고당하고 싶지 않다면 평소처럼 행동해야 하니까요. 정의 실현에 걸림돌이 되는 편견은 사라져야 합니다.

회사들은 의욕이 지나쳐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미국 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내 연애금지 수칙은 주제넘고 불필요할 뿐 아니라 종종 잘못된 결과를 낳습니다. 사람들은 직장 동료와 사랑에 빠지기도 합니다. 연애 사실이 발각되어 둘 중 한 명이 퇴사해야 하는 경우 대부분 여성이 그만두게 됩니다. 보통 여자가 남자보다 어리고 연봉도 낮기 때문이죠. 불공평하기 짝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남성 상사들이 오해받을까 두려워 신입 여직원들에게 멘토링 해주기를 꺼리는 환경에서 여성의 커리어 발전이 이뤄질 리 만무합니다. 또, 흔히 볼 수 있는 매우 형식적인 성범죄 예방 교육은 직원들의 반감을 살 수 있고, 특히 잘못된 예를 들어 설명할 경우 피해자에 대한 동정심이 오히려 줄어드는 역효과를 낳기도 합니다.

아주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직장 내에서 인종차별이나 동성애 혐오 발언을 쉽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런 종류의 발언은 찾아보기 힘들뿐더러, 인종이나 성적 지향에 대한 혐오 발언이 들리는 경우 십중팔구는 지적을 받습니다. 직장 내 성범죄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들춰내고 지적해야 멈출 수 있습니다. 이는 피해자들만의 몫이 아닙니다. 현장을 목격하는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하는 원칙입니다.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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