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선후보 에마뉘엘 마크롱
2017년 5월 1일  |  By:   |  세계, 정치  |  No Comment

* 프랑스 대선은 우리나라와 달리 두 차례에 나눠 투표하는 결선 투표제로 치러집니다. 지난달 23일 1차 투표에서 앙마르슈!(En Marche!, 앞으로 행진! 이라는 뜻) 당의 에마뉘엘 마크롱 후보와 국민전선(Front National)의 마린 르펜 후보가 결선에 진출해 오는 7일 투표를 앞두고 있습니다. BBC가 정리한 두 후보의 약력과 정책, 정치적 의미 등을 소개합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후보 (사진: 게티이미지)

 

마크롱이 앙마르슈를 창당한 건 불과 1년 전인 2016년 4월. 정당을 창당했다기보다는 새로운 정치 캠페인의 시작을 선언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겁니다. 그리고 넉 달 뒤 그는 장관직에서 사퇴하고 대통령 출마를 선언합니다.

기껏해야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리라던 예상을 뒤엎고 그는 현재 당선 가능성이 가장 큰 유력 차기 대통령으로 결선 투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젊은 정치인은 프랑스라는 나라를 이끌 자질을 갖췄을까요?

 

야심가

2016년 4월 아직 쌀쌀한 어느 봄날 밤, 파리 북쪽 외곽의 한적한 마을 아미엥(Amiens)에 200여 명이 모입니다.

이날 모임에서 연설을 하기로 한 이는 프랑스 경제부 장관, 에마뉘엘 마크롱이었습니다. 연설을 들으러 모인 이들은 마크롱 장관의 친지와 친구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전반적으로 격식 없이 편안한 자리였습니다. 단출한 공간에서 마크롱 장관은 연설했고, 장관의 부인은 제일 앞줄에 앉아 연설 내용을 메모했습니다.

“누군가의 결혼식에 온 듯한 느낌도 들었어요. 작은 방에 다 같이 모여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연설도 그 연장선 같았죠.”

이날 모임에 참석했던 누군가의 말입니다. 비록 새로운 부부가 탄생한 결혼식은 아니었지만, 역사는 이날을 중요한 탄생의 날로 기억할 것입니다.

한 시간가량 프랑스 산업의 미래와 고용에 관해 일장 연설을 하고 나서 마크롱 장관은 그날 그가 전하려던 핵심 의제로 넘어갑니다. 새로운 정치 운동, 앙마르슈!(En Marche! 행진! 또는 앞으로 나아가자!는 정도의 의미)의 출범을 선포한 겁니다.

사회당 정부의 요직이라 할 수 있는 경제부 장관에 현직으로 있으면서 (당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새로운 캠페인을 시작한다는 건 대담한 일이었습니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발탁한 인재로 올랑드를 이어 언젠가 사회당을 이끌 만한 미래의 재목이라는 평가를 받기는 했지만, 그가 이렇게 빨리 도전하리라는 것을 눈치챈 이는 거의 없습니다.

지난해 4월 그 밤, 아미엥에는 새로운 운동을 알리는 단체의 깃발도, 방송사 카메라도, 그 어떤 캠페인 전단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불과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 새 프랑스 정치 판세는 완전히 새로 짜였고, 이 젊은 정치인은 가장 유력한 차기 대통령이 됐습니다. 현대 프랑스 정치사에서 이렇게 이른 시일 내에 유력 정치인으로 발돋움한 사람은 지금껏 없었습니다. 마크롱의 정치 멘토이자 측근으로 분류되는 알랭 맹은 말합니다.

“몇 달 사이 어린이가 청년이 되더니, 금방 성인이 되어버린 셈이죠. 저는 지난 15년간 아주 가까이서 마크롱과 함께했습니다. 그런데 특히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해 정치를 익혀가는 과정은 무척 놀라웠습니다. 마치 창문 너머로 던져도 본능적인 균형 감각을 발휘해 두 발로 안정적으로 착지하는 고양이를 보는 것 같았어요.”

마크롱의 꿈은 원래 정치인이 아니었습니다. 아미엥에서 보낸 학창 시절, 마크롱의 꿈은 소설가였습니다.

예수회 사립 학교인 라프로비당스를 함께 다닌 같은 반 친구 앙트완 마구에는 마크롱을 총명하고, 또래보다 특히 어른스러웠던 친구로 기억했습니다. 마크롱은 프랑스 고전 문학을 읽고 시를 썼으며, 식민지를 개척하는 스페인 정복자가 등장하는 소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에마뉘엘 마크롱은 항상 무언가 남들과 다른 친구였어요. 다들 TV를 즐겨 보는 나이에 마크롱은 항상 무언가를 읽었어요. 어떤 면에서 선생님이 없을 때 친구들 중 가장 선생님에 가까운 친구였죠. 더 멀리, 더 높이, 더 빨리라는 올림픽 정신을 똑똑함과 지혜에 관해 구현할 수 있다면 마크롱이 바로 그런 친구였죠.”

이 친구를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다들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아, 이 녀석은 정말 비범하구나, 무언가 다르구나, 그런 생각을요. – 앙트완 마구에 –

마크롱의 연극 선생님이었던 브리짓 트로노는 특히 마크롱의 비범함을 높이 샀습니다. 지난해 한 다큐멘터리에서 트로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크롱은 다른 아이들과 달랐어요. 10대 청소년의 감수성이 아니었죠. 이미 다른 어른들과 말도 잘 통했고, 동등한 관계를 맺었어요.”

하루는 마크롱이 선생님과 함께 마지막 연극 수업 때 무대에 올릴 극의 대본을 쓰고 싶다며 계획을 짜 왔습니다. 트로노는 마크롱이 이내 지루해지겠지 생각했습니다.

“얼마 안 가 흐지부지될 줄 알았죠. 그런데 같이 대본을 쓰는데, 마크롱은 정말 조금씩 깨우쳐가며 끝없이 나아지고 끝내 일을 다 해내더라고요. 정말 똑똑한 친구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죠.”

선생님이었던 트로노와 결혼하겠다고 맹세하고 마크롱은 16살에 공부를 마치러 아미엥을 떠나 파리로 갔습니다. 트로노는 이 시절을 여전히 기억합니다. “매일 몇 시간씩 통화했죠.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 결혼은 말도 안 된다던 제 반대가 누그러졌어요. 마크롱이 정말 끈질기게, 그렇지만 아주 훌륭하게 저를 설득해냈죠.”

브리짓 트로노는 마크롱보다 24살이 많습니다. 당시 결혼해 아이 셋을 둔 엄마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트로노는 남편과 이혼하고 학생이었던 마크롱과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2007년에 결혼합니다.

마크롱의 성공을 조명한 책을 쓴 앤 풀다는 이 부부의 아주 특이한 러브스토리만 봐도 한번 결심하면 반드시 해내고 마는 마크롱의 성미와 자신에 대한 믿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마크롱은 제게 이렇게 말했어요. 자기는 끝없이 투쟁하며 살아왔다, 쉬운 것도, 분명한 것도, 알아서 척척 되는 것도 전혀 없었다고요. 무언가를 할 때 정해진 길이 있어서 그것만 따라갔던 적은 한 번도 없고, 항상 끊임없이 고민하고 싸워가며 얻어냈다고요.”

풀다는 이 부부가 한동안 자신들의 이야기가 공개되는 걸 꺼렸지만, 마크롱이 대통령 출마를 결심한 뒤 태도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고 말합니다.

마크롱은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가 엄청난 비난과 조롱을 뚫고 수도 파리도 아닌 작은 마을에 있는 세 아이의 어머니이자 자기보다 24살이나 많은 여성에게 사랑을 고백해 그 사랑의 결실을 볼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뚝심 있게 진심을 전하면 프랑스 유권자들의 마음도 얻을 수 있다고 말이죠. – 앤 풀다, 마크롱 자서전 작가 –

 

출마

2016년 4월 출범한 앙마르슈는 기존 정치권으로부터 온갖 조롱과 비아냥을 받았습니다. 얼마 안 가 실패할 것이 뻔한 순진하고 의미 없는 운동으로 치부됐죠. 마크롱과 함께 올랑드 정부에서 일하던 한 장관은 앙마르슈 링크에 “혼자 걸었어(I Walk Alone)”라는 제목의 노래를 붙인 글을 소셜미디어에 올리며 앙마르슈를 한껏 비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에마뉘엘 마크롱과 앙마르슈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20만 명 넘는 사람이 앙마르슈 회원으로 등록했죠. 물론 가입비도 없고, 기존 정당 당원이면서도 앙마르슈에 등록할 수 있기는 했습니다.

앙마르슈가 세를 불림에 따라 마크롱이 대선 출마를 점치는 이도 많아졌습니다.

사실 마크롱은 오래전부터 언젠가 대통령에 출마하겠다는 생각을 품어 왔습니다. 다만 이를 여러 정치적인 처신과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 잘 드러나지 않게 관리해왔을 뿐입니다. 마크롱의 정치적 스승이기도 한 알랭 맹은 마크롱이 항상 정치 인생의 최종 목표로 대통령직에 도전하는 것을 꿈꿔 왔다고 말합니다.

15년 전 제가 마크롱과 처음 이야기를 나눴을 때 이런 이야기를 나눴어요. 제가 먼저 앞으로 20년 뒤에 무엇이 되어 있을지 물었더니, 마크롱은 망설임 없이 말했어요. “대통령이요.”라고. – 알랭 맹 –

맹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마크롱에게 차기 대선인 2022년을 노려보라고 여러 차례 권했습니다. 하지만 마크롱은 그때마다 지금이 적기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애매모호한 마크롱 씨>를 쓴 마르끄 앙데벨드는 2015년 가을에 마크롱은 이미 모든 준비를 사실상 마쳤다고 분석합니다. 다만 2015년 11월 파리 테러와 이듬해 3월 브뤼셀 테러 때문에 마크롱은 앙마르슈를 비롯한 자신의 정치 행보를 4월까지 미뤄야 했습니다.

마크롱 주변 인물 가운데 이번 선거에 도전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마티유 랭은 그 몇 안 되는 이들 중 한 명입니다.

“우리는 뭔가 정말 특이한 일을 해냈죠.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마크롱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한 서너 명밖에 없었어요. 마크롱은 중심을 잘 잡아주고, 여러 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죠. 무엇이든 한 걸음씩, 천천히 생각을 다듬어 나갑니다. 마크롱의 입에서 나오는 어떤 말이든 하루아침에, 퍼뜩 떠오른 생각은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런던에 있는 마티유 랭의 시장조사 회사 사무실에 랭을 만나러 갔을 때 랭은 마크롱 캠프 사람들과 통화 중이었습니다. 통화가 끝난 뒤 저와 이야기하러 앉은 랭의 표정은 잔뜩 상기돼 있었습니다.

“지금 기분 대로라면 에마뉘엘이 사랑하는 제 아내보다 더 예뻐 보일 지경이네요! (결선 투표에 갈 수 있는) 2등으로 올라섰어요! 오늘만 마크롱하고 문자를 15통은 주고받은 것 같아요, 하하.”

그는 마크롱이 이번 대선 출마를 결심한 데는 올랑드 정부에서 일했던 경험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말합니다.

사회당 정부의 경제부 장관으로서 마크롱은 몇 가지 개혁 법안을 앞장서서 추진했는데, 마크롱법(Loi Macron)이라고 이름 붙여진 법안들은 주로 시장 원리를 더 도입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노동계의 즉각적인 강력한 반발에 직면한 마크롱 장관은 특히 당내 분열로 어떤 리더십도 보이지 못하는 사회당과 무조건 반대만 외치며 변화 자체에 완강히 저항하는 국회에 환멸을 느낍니다.

랭은 이 당시 마크롱이 정치의 높은 벽에 가로막혀 두 다리가 부러진 것처럼 좌절했을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때 제가 마크롱에게 이렇게 말했죠. 이 모든 진흙탕 싸움을 정리하고 정말 나라를 제대로 개혁할 수 있는 자리는 결국 단 하나, 대통령밖에 없다고요. 저는 마크롱에게 대통령에 출마하라고 그야말로 집요하게 부추겼습니다. – 마티유 랭 –

2015년 12월, 랭은 주간 시사잡지 르 쁘앙(Le Point)에 칼럼을 한 편 씁니다. 2017년 프랑스를 이끌 대통령으로 마크롱이 적임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공개적으로 마크롱의 대선 도전을 천명한 건 이 글이 처음이었습니다.

이듬해 여름이 되자 여기저기서 변화가 감지됐습니다. 상황이 변해 2017년 선거는 어느덧 도전에 적기로 보였습니다. 2016년 11월, 마크롱은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합니다.

 

앙마르슈의 어제와 오늘

마크롱 후보 캠프 내의 분위기는 파리 중앙 정치권보다는 실리콘 밸리에 더 가깝습니다. 깔끔한 원색, 무채색 위주의 사무실과 편안한 티셔츠 유니폼을 입은 자원봉사자 선거운동원들이 피곤하면 언제든 잠깐 눈을 붙일 수 있도록 간이침대나 소파가 놓여 있습니다. 자원봉사자 대부분은 20대 젊은이들입니다.

캠프 재정 담당 부서의 라파엘 쿨론이 앉은 자리 너머 벽에는 누군가 마크롱을 슈퍼맨에 빗대어 만화로 그려놓았습니다. “제 작품이에요.” 쿨론은 웃으며 말합니다.

저희가 마크롱 후보의 개인 팬클럽은 물론 아니죠. 그렇지만, 우리 모두 마크롱이라는 인물과 그의 신념, 생각을 깊이 신뢰하고 있어요. 우리 모두 그를 지지합니다. – 라파엘 쿨론 –

마크롱은 여러 차례 새로운 정치를 펴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기성 정당 체제에 전혀 기대지 않고 열성 지지자들로만 조직을 꾸린 것이 마크롱 열풍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앙마르슈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 운동이야말로 우리 하기에 달렸다’는 생각을 널리 공유하고 있습니다.

“앙마르슈가 첫걸음을 뗀 그 날부터 우리 한 명 한 명의 참여가 앙마르슈를 여기까지 이끌어 왔습니다.”

프랑스 좌우 정당 사이에 있는 이념 간극과 같은 생각의 차이를 메우기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개인적인 접근이 효과적일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정치적 운동이란 참여하는 이들을 한데 묶어낼 수 있는 아이디어 혹은 사상적 기치가 필요한 법입니다.

마크롱의 개인적인 카리스마가 앙마르슈를 일으켜 세우고 여기까지 끌고 오는 데 큰 역할을 했다지만, 프랑스의 중도 성향 유권자에게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 정치적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는 과제가 여전히 마크롱에게 남아 있습니다.

마크롱 캠프 선거운동원들은 그 어떤 정책이나 심지어 캠프의 구체적인 기본 원칙을 정하기도 전에 전국 가가호호를 찾아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유권자들과 상당히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이들이 지금 프랑스에 느끼는 문제가 무언지, 정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유심히 듣고 꼼꼼히 기록해 이를 모았습니다. 앙마르슈의 선거 컨설팅 회사를 세운 귈라움 리에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보통 공약을 만들고 정치적 비전을 제시할 때 대부분 먼저 전문가들을 찾죠. 전문가들은 아주 똑똑하고, 그런 일에는 도가 튼 이들이니까요. 하지만 실제 유권자들이 일상에서 무엇을 느끼는지를 반영하지 못한 정책은 그만큼 공허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앙마르슈는 먼저 현장으로 달려간 겁니다.”

앙마르슈는 그랑드 마르슈(Grande Marche, 가가호호 방문하며 유권자를 만난 앙마르슈의 대국민 인터뷰)를 통해 유권자 2만5천 명의 상세한 견해를 담아냈습니다.

리에지는 2008년 미국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오바마 캠페인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당시 미국 유권자들을 만나며 ‘가려운 곳’을 찾아내 맞춤형 정책과 전략을 찾았던 것처럼 앙마르슈는 프랑스 유권자와 나눈 대화 내용을 꼼꼼히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선거를 준비했습니다.

앙마르슈의 자원봉사자들이 프랑스 유권자를 만날 때 꼭 하는 질문이 두 가지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제대로 돌아가는 건 무엇이고, 반대로 잘 안 되고 있는 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입니다. 흥미로운 모순점도 드러났습니다.

“많은 사람이 학교는 대체로 원만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답했는데, 동시에 무엇이 잘 안 되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또 많은 사람이 국가 교육 제도를 꼽았어요. 일선 학교와 교육 제도를 유권자들이 다르게 인식하고 있던 것이죠. 이렇게 미묘한 사안임을 생각하면 해결책도 복잡해질 수밖에 없죠.”

대통령직에 도전할 뜻이 있음을 시사한 첫 번째 대중 연설에서부터 마크롱은 프랑스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문제가 있는 제도에 대한 비판에는 거침이 없었습니다.

저는 현재 우리 정치 제도를 직접 겪어봤습니다. 다수의 국민이 동의하는 정책이나 아젠다마저 기성 정당들과 기득권 정치세력을 약화시킬 우려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프랑스를 해칠지 모른다는 억지 이유로 사장되는 실정입니다. 지금 우리 정치 제도는 눈과 귀를 닫고 있어요.

마크롱이 마침내 공개한 정책과 공약은 대체로 너무 애매하고 뻔한 소리라는 이유로 조롱의 대상이 됐습니다. 이는 1차 투표일 당일까지 계속됐습니다. 마크롱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마크롱이 어떨 때는 뭐든지 다 찬성하고, 또 어떨 때는 죄다 반대한다면서 자기 의견이 없는 사람이라고 공격했습니다.

투표를 앞두고 치러진 대선 토론에서 마크롱의 상대인 극우 정치인 마린 르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마크롱에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크롱 후보님, 후보님은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능력이 출중하시네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지금 방금 무려 7분 동안 쉼 없이 무슨 말을 하셨는데, 저는 도대체 마크롱 후보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정리가 안 돼요. 다시 말하면, 방금 후보님이 늘어놓은 장광설은 아무런 내용도 없는 빈껍데기란 말입니다.”

리에지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는 마크롱이 아주 실용적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프랑스에 필요한 건 아이디어가 아니에요. 결국은 접근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지금 나라를 개혁하려 한다면 무엇보다도 체계적으로 접근해야지 그저 “제가 해내겠습니다!” 이런 자세로는 아무것도 안 된단 말이죠. 계획을 세워서 차근차근 풀어가야 합니다.”

체계적인 접근법 말고 운도 좀 따라야 하는데, 마크롱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운이 좋았습니다.

일단 마크롱이 부상할 수 있는 틈이 생긴 것부터 그렇습니다. 프랑스의 기존 양대 정당인 집권 사회당과 중도우파 공화당은 계속 헛발질을 하며 자멸했습니다. 유권자들은 두 기성 정당이 내세운 정치적 구호를 변화와 개혁에 대한 아무런 의지 없이 그냥 입바른 소리만 하는 구태 정치로 인식하고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회당은 지난 수년간 분열과 무기력에 시달려 왔습니다. 공화당이라고 사정이 딱히 낫지도 않았습니다. 특히 공화당은 대통령 후보로 뽑은 프랑수아 피용 전 총리가 부인을 허위로 채용한 뒤 세금으로 꼬박꼬박 부인 월급을 지급했다는 치명적인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당 전체가 타격을 입었습니다. 결국, 이번 선거는 프랑스 대선에서 결선 투표제가 도입된 이후 처음으로 양대 정당 출신이 아닌 두 후보가 결선 투표를 치르는 선거가 기록됐습니다.

기성 정당에 대한 환멸과 구태 정치에 대한 염증은 마크롱과 마린 르펜이 줄기차게 파고들던 이슈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 전략은 먹혀들었죠.

마크롱은 사회당의 표를 다수 빼앗아 왔습니다. 그리고 마누엘 볼 전 총리처럼 한때는 정치적으로 치열한 경쟁 관계였던 정치인들의 지지 선언을 끌어내기도 했습니다.

마크롱의 등장은 많은 프랑스인들에게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고 마르끄 앙데벨드는 말합니다. 앙데벨드가 꼽는 가장 큰 이유는 프랑스 정치 전반에 팽배한 연륜과 경력을 중시하는 문화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기득권 정치인들이 볼 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39살 젊은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겠다는 야망을 펼치는 것 자체가 믿을 수 없는, 정신 나간 짓이라는 겁니다.

젊은 후보의 패기 있는 도전은 “샴페인의 거품”처럼 이내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비아냥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마크롱은 앞서 언급했듯 뼈대 있는 정당 출신도 아니고 이렇게 큰 선거를 치러 본 경험도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마크롱이 결선 투표에 진출한 지금, 그를 향하던 비아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대담하고, 위험을 무릅쓸 줄 아는 사람이죠. 마크롱은 도박사와도 같습니다. – 알랭 맹 –

공화당의 알랭 쥐뻬, 사회당의 마누엘 볼 같은 상대적으로 중도 성향 후보가 당내 경선에서 더 강경한 후보에게 패하면서 결과적으로 중도 성향 후보가 발 딛고 일어설 지대가 넓어진 것도 마크롱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알랭 맹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난 몇 달간 마크롱에게 잇달아 찾아온 행운을 되새겨보면, 정말 이 친구가 신탁을 받았나 싶을 정도라니까요. 안 그래도 그런 것 아니냐고 농담 삼아 여러 번 물어보기도 했어요. 2주 전에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그 신탁 유효기간이 언제까지냐고 물었더니, 마크롱이 하는 말이 그런 것 없다고, 영원히 계속된다고 하더군요. 마크롱은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그 도전에는 끝이 없어요.”

 

정치인 마크롱

오랫동안 기다려 온 마크롱의 공약 발표식은 어느 봄날 아침,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한 화려한 회의장에서 열렸습니다. 프랑스식 창살에 비쳐드는 햇살 사이로 말쑥하게 차려입은 웨이터들이 마크롱의 발표를 기다리는 기자들에게 커피와 오렌지주스를 대접하고 있었습니다.

발표식이 열린 건 영화 라라랜드가 오스카에서 여러 상을 휩쓴 지 며칠 뒤였습니다. 마크롱이 말만 번지르르하고 정책에 알맹이가 없다고 비난하는 이들은 마크롱의 공약을 가리켜 “블라블라랜드”라고 비꼬았습니다.

비판도 있었지만, 어쨌든 마크롱의 공약은 모든 프랑스인을 겨냥하고 있었습니다. 농민과 제조업, 자영업자, 노동자, 사업가 모두에게 맞춤형 공약을 내놓았습니다. 마크롱은 저소득층 지원을 위한 감세 정책과 공공부문 500억 유로 투자, 그리고 정부 지출 축소를 약속했습니다.

무대에 오른 마크롱은 오랫동안 자신의 정책과 제안을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정책이 좌파 정책인지 우파 정책인지 물을 겁니다. 저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제가 오늘 발표하는 정책은 21세기 프랑스 모두를 위한 정책이라고.”

얼굴에 웃음기를 잃지 않은 채 마크롱은 회의장에 빼곡히 모인 기자 수백 명의 질문에 모두 답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약속대로 질의응답이 3시간째 이어졌을 즈음 한 기자가 투자은행에서 일했던 마크롱의 경력에 관해 물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기득권 세력 출신이라는 딱지를 달고 노동 계급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겠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마크롱은 자신이 특권층 출신이라는 지적에 단호히 반대하며 격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습니다. “저는 기자, 정치인, 은행가 같은 이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작은 지방 마을의 평범한 가정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는 짜증 섞인 태도로 자신의 배경에 대해 강변하듯 답했습니다.

제가 계층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던 건 교육 덕분이었습니다. 갈림길에 설 때마다 저는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제가 노동자와 서민, 중산층의 후보라고 누구보다 떳떳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에마뉘엘 마크롱 –

마크롱은 기득권 엘리트 집안 출신이 아닙니다. 똑똑한 머리에 피나는 노력을 더해 이 자리까지 자기 자신의 능력만으로 올라온 그이기에 출신 배경에 관한 지적에 특히 예민할 수 있습니다.

“제 할아버지, 할머니 네 분은 선생님, 철도 노동자, 사회복지사, 교량 건축 기사셨어요. 저는 전형적인 노동자 계급 출신의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어요.”

그의 출신 배경과 경력에 관한 반론은 때로 그 자체로 비판 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마티유 랭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은행에서 일했고 상대적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는 사실이 영국 같으면 공직에 진출하는 데 전혀 문제가 될 일이 아녜요.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얘기가 다르죠. 마크롱은 항상 영리를 추구하는 민간 부문에서 일했던 경력 자체를 마치 잘못을 해명하듯 수세적으로 언급하게 되는 상황에 부닥칩니다. 늘 나오는 질문도 똑같죠. 다만 그가 그럼에도 감정을 잘 추스르고 침착하고 냉정하게 답하는 게 낫다는 지적에는 공감합니다. 마크롱은 전반적으로 예의 바른 사람이에요. 이따금 감정을 드러내는 거죠.”

  • 마크롱의 공약
    • 공공 부문 일자리 창출에 500억 유로(62조 5천억 원) 투자, 재생에너지 위주로 에너지 정책 재편, 인프라 구축 및 현대화
    • 안경, 틀니, 보청기 비용 전액 국가 부담
    • 법인세 인하, 주 35시간 노동시간 조정 시 고용주 재량 확대
    • 실업률 7%로 낮추기 (현재 실업률 9.7%)
    • 15세 이하 학교에서 휴대전화 사용 금지, 18세 학생 전원에 연간 500유로 문화 이용권 증정

마크롱이 주장하는 경제 개혁은 프랑스에서 특히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는 문제를 두루 다루고 있습니다.

주요 노동조합을 비롯한 전통적인 좌파 성향 유권자들과 많은 사회당원은 회사가 채용과 해고를 더 쉽게 할 수 있게 하고, 임금을 정하고 노동 시간을 늘리는 데도 회사에 지금보다 더 많은 권한을 주는 마크롱의 공약에 결사적으로 반대합니다.

마크롱은 특히 블루칼라 노동자 계급에서 인기가 없는데, 이는 전체 블루칼라의 절반 정도로부터 표를 얻은 상대 후보 마린 르펜과 비교할 때 특히 두드러지는 약점입니다.

사회당 최고위원인 마르탱 오브리는 마크롱의 공약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고 맹렬히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에마뉘엘 마크롱이 하는 걸 보면, 아마 마크롱은 그냥 뭔가 새로운 상품 하나 만들어 놓고 알맹이도 없이 그저 사람 좋은 웃음만 짓고 있으면 대통령이 되는 줄 알고 있는 것 아닌지 우려됩니다. 제가 늘 말하지만, 무언가를 명확히 말하지 않고 얼버무리는 정치인의 공약 주변에는 거기서 부당한 이득을 챙기려는 승냥이가 있는 법입니다.”

마크롱이 내놓은 공약을 보니, 승냥이 한두 마리가 아니라 승냥이 떼가 도사리고 있는 공약 같습니다. – 마르탱 오브리 –

오브리는 마크롱의 정책을 1980년대 영미식 신자유주의 개혁에 비견했습니다. 공공 부문의 역할을 줄이고, 정부 재정을 축소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며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을 늘리고 임금은 줄이는 걸 개혁이라 부르는 궤변이나 다름없다는 비판입니다.

사회당 안에서도 중도 성향 당원과 유권자 중에는 프랑스 경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원칙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마크롱도 자신을 항상 좌파로 생각한다고 밝혀 왔습니다. 하지만 멘토인 알랭 맹은 마크롱의 개혁 의제는 조금 결이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마크롱은 좌파이면서도 자유주의 원칙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프랑스 정치에서는 새로운 인물이죠. 프랑스 사회당 안에도 사민주의를 주창하는 세력이 없지 않았지만, 마크롱은 그들보다도 시장의 힘을 더 믿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 토니 블레어의 정치적 양자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1차 투표를 앞두고 우파의 표를 끌어오기 위해 선거 막바지에 마크롱이 토니 블레어 전 총리보다도 더 시장 중심적인 뉘앙스를 풍겼다고 분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편 정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표를 얻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크롱은 경제부 장관 시절, 자신의 개혁 아젠다를 실행에 옮길 동력을 얻기 위해 우파 의원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했습니다. 마티유 랭은 우파 의원들을 설득하는 일이 마크롱에게 떠올리기 싫은 경험으로 남았을 거라고 말합니다.

“상당수 우파 의원들이 이런 식으로 말했거든요. ‘마크롱표 법안이요? 아주 좋죠, 우리도 마음에 드는 부분이 꽤 많아요. 그런데 좌파가 발의한 법이잖아요? 우리는 거기에 표는 못 주니 그리 아세요.’ 정치를 이런 식으로 운영되게 내버려 둬서는 정말 안 되겠다고 절실히 느낀 계기이자 새로운 운동을 꿈꾸게 된 시작이기도 했죠.”

마크롱은 프랑스에 필요한 정치가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결이 아니라 보호주의와 세계화 사이의 경쟁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가 가장 경계하고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자신이 버리고 나온 사회당도, 프랑수아 피용의 공화당도 아닙니다. 대신 마린 르펜의 정책 가운데서도 특히 국경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자유주의 정책을 폐기해야 한다는 보호주의 논리를 마크롱은 집중적으로 공략했습니다.

유럽연합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마크롱과 르펜은 거의 완벽한 대척점에 서 있습니다. 마크롱은 1차 투표에 나선 주요 후보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유럽연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후보였습니다. 마크롱의 의식은 그가 속한 세대가 그렇듯 전반적으로 하나의 유럽을 지지한다고 설명합니다.

“유럽연합이 안보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평화의 매개체가 되고 그렇게 복잡한 계산을 하기 이전에, 마크롱의 세대에게 하나의 유럽은 너무나도 당연한 겁니다.”

마크롱은 새로운 세대 출신이에요. 다른 나라들이 프랑스를 보는 시각을 바꾸어놓을 만한 인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알랭 맹 –

이민, 문화, 국가 정체성 등 다양한 의제가 선거 기간 화두가 되었습니다. 마크롱은 특히 정책 공약집에서 최우선 공약으로 교육 정책을 꼽았습니다. 교육 정책은 “프랑스를 하나로 묶어내는 원천”이라는 설명이 붙었습니다.

마크롱의 삶에서 선생님은 여러모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자신의 연극 선생님과 결혼하기 한참 전에 마크롱은 외할머니 마네뜨를 특히 따랐습니다. 마네뜨도 선생님이었습니다. 마크롱은 자신의 자서전을 쓴 앤 풀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외할머니 덕분에 정치적 운명이라는 걸 믿게 됐습니다.”

마크롱의 기억 속 외할머니는 강인하고 엄격한 사람이었습니다.

“마네뜨는 손주에게 마냥 오냐오냐하는 외할머니가 아니었어요. 마크롱이 독서와 문화적 가치에 눈을 뜨게 된 데는 외할머니의 역할이 컸죠.”

마크롱은 로실드 투자은행에서 일할 때든 정부에서 장관으로 일할 때든 거의 매일 밤 외할머니와 통화를 했을 것이라고 풀다는 말합니다. 반면에 마크롱의 아버지는 아들이 공직에 있을 때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할 정도로 왕래가 뜸했다고 말했습니다.

마크롱은 늘 자신이 좋아하고 따르는 여성과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대상이 외할머니였다가 지금은 아내인 브리짓으로 바뀌었다. – 앤 풀다 –

 

이미지와 현실의 간극

외할머니 마네뜨의 영향은 어린 마크롱에게 가치관을 심어준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마네뜨 덕분에 마크롱은 자신을 노동자 계급 출신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마네트의 어머니, 그러니까 마크롱의 외증조할머니는 글을 읽고 쓸 줄 몰랐습니다. 문맹이었던 필부의 증손주라는 점이 분명 투자은행에서 일한 적 있는 신경과 전문의의 아들이라는 사실보다 프랑스 대통령직에 도전하는 이를 극적으로 그려내기 좋은 타이틀입니다.

마크롱은 자서전에서든 인터뷰에서든 둘 다 의사인 부모가 주목받는 것 같은 시점에 항상 화제를 외할머니에게서 받은 영향으로 돌리곤 합니다. 마크롱의 어머니인 프랑수아즈 노게 마크롱 씨가 자서전을 쓴 앤 풀다에게 이렇게 푸념했을 정도입니다.

“(아들에 관한) 기사들을 보고 있자면, 에마뉘엘은 뭐 외할머니 말고는 가족이 없는 것 같더군요! 굳이 그렇게 해야 하는 건지 전 사실 잘 모르겠어요. 에마뉘엘은 시골에서였지만, 부족한 것 없이 넉넉한 집안에서 자랐어요. 저와 남편은 열심히 일하고 자식에게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죠.”

전통적으로 프랑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가정이었어요. 아들이 그려내는 것처럼 이 세상에 마크롱을 잇는 핏줄이라곤 에마뉘엘과 우리 어머니(에마뉘엘의 외할머니)만 존재하는 그런 환상적인, 훌륭한 세상과는 분명 거리가 있었죠. – 프랑수아즈 노게 마크롱, 에마뉘엘 마크롱의 어머니 –

‘기존 정치 체제와 프랑스 기득권 정치 세력에 물들지 않은 신선한 인물, 개혁을 이끌 적임자.’ 마크롱이 구축해 온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입니다. 파리의 엘리트 특권층이라는 이미지를 지우려는 마크롱에게 시골 출신이라는 점, 불과 증조할머니만 해도 글을 읽고 쓰지 못했다는 점은 효과적인 수단이었습니다.

하지만 마크롱의 부모가 둘 다 의사였다는 점, 그가 시골이라 부르는 아미엥 출신이긴 하지만 그곳에서 공교육을 받지 않고 사립학교에 다녔다는 점, 16살에 전학 간 파리의 학교가 프랑스 최고 명문인 앙리 4세 고등학교라는 점, 그랑제꼴 중에서도 고위 공무원과 관료들의 산실인 엘리트의 집합소 국립행정학교(E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를 나왔다는 점은 마크롱이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랑제꼴을 졸업한 뒤에도 마크롱은 소위 프랑스의 킹메이커들을 비롯한 정치 엘리트와 꾸준히 만났습니다. 로실드 투자은행에서 일할 때 많은 돈을 번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마크롱을 기득권을 혁파할 후보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요? 알랭 맹도 이 점은 인정합니다.

“마크롱을 반(反) 기득권 후보라고 부르는 건 좀 지나치죠. 기존의 낡은 정치 체제를 바꾸려는 마크롱의 의지는 분명하지만, 그는 엄연히 프랑스 교육 시스템이 키워낸 인재이니까요. 프랑스 정치는 지금껏 새로운 인물에게 기회를 주며 발전해 왔습니다. 조르주 퐁삐두가 그랬고, 레이몽 바르, 로베르 바댕테르, 자끄 들로르도 마찬가지였죠. 다만 마크롱은 어떻게 보면 도박에 가까운 과감한 도전을 이어오면 여기까지 그 누구보다 빠르게 올라온 것이 차이라면 차이입니다.

마크롱은 특히 지인들로부터 도박에 가까운 모험적인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심심찮게 받습니다. 이들은 마크롱이 똑똑하면서도 거부하기 어려운 매력이 있다는 평가를 곁들이곤 합니다. 마티유 랭은 이렇게 말합니다.

“진짜로 똑똑한 친구예요. 그런 동시에 아주 인간적이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공감 능력도 정말 뛰어난 사람이죠. 항상 믿을 수 없을 만큼 긍정적이고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땐 특히나 품이 넓죠.”

마크롱과 이야기하다 보면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져요. 대화를 그렇게 이끌어가는 것도 마크롱의 능력이죠. – 앙트완 마구에, 마크롱의 친구 –

마크롱의 대중 연설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습니다. 마크롱은 특히 청중과 감정적으로 함께 호흡하며 스스로 연설에 몰입해 듣는 이를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는데, 한껏 고무된 감정으로 마치 종교 지도자가 설교하듯 청중에게 거침없이 메시지를 전합니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두 팔을 넓게 벌려 지지자들에게 감사하다, 사랑한다고 말하며 자신을 끝까지 응원해달라고 호소하는 마크롱과 여기에 환호하는 지지자들의 모습은 흡사 록스타의 콘서트를 방불케 합니다.

앤 풀다와의 인터뷰에서 부인 브리짓은 마크롱의 전혀 다른 모습에 관해 귀띔했습니다.

그 누구도 다가갈 수 없는 그 자신만의 영역이 또한 명확한 사람이 마크롱이에요. 항상 사람들과 필요하면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줄 알죠. – 마크롱의 부인 브리짓 –

그가 올랑드 정부의 장관직을 그만두고 대통령이 되고자 자신이 주도하는 정치적 여정을 시작한 과정도 이미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르몽드의 보도에 따르면, 경제부 장관이던 마크롱은 앙마르슈의 닻을 올리기 이틀 전에 프랑스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에서 올랑드 대통령을 따로 만나 태연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모레 4월 6일에 제 고향 아미엥에서 무언가를 하나 시작하려고 하는데요, 젊은이들의 정치참여를 독려하는 운동 같은 겁니다. 일종의 싱크탱크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마크롱의 전 참모는 르몽드에 이즈음 마크롱의 행동은 표리부동의 극을 달렸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그는 이를 꼭 의뭉스럽거나 부정적인 것만으로 보지 않았고, 대신 때로는 유용한 정치적 모호함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다른 사람들, 특히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는 정치적으로 너무 선명하지 않게, 이도 저도 아닌 모습을 보여야 할 때도 있으니까요. 감쪽같은 속임수를, 그것도 자신을 발탁한 현직 대통령을 속인 셈이죠. 마치 먹잇감이 경계를 풀고 잠들 때까지 기다리는 뱀처럼요. 게다가 올랑드 대통령은 현실이 어떤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어요.”

아마 올랑드가 되고 싶은 이상적인 모습의 정치인에 가까운 사람을 꼽으라면 그게 바로 마크롱일 겁니다. 올랑드는 결국 정치적으로 마크롱에게 끌려다닌 건지도 모릅니다. – 마르끄 앙데벨드 –

앤 풀다의 결론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겉보기엔 무척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좋은 사람이지만, 사실 속은 아주 단호하고 야심이 가득한 사람. 마크롱은 그런 사람 같습니다. 대개 똑똑한 사람들이 그렇듯 마크롱도 무언가에 쉽게 흥미를 잃어요. 한번 목표가 생기면 그 목표를 이루려고 온 힘을 다하지만, 그 목표를 이루고 나면 또 재빨리 다른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달려들죠.”

마크롱은 누군가를 설득하는 데 특출난 능력이 있고, 스스로 그 능력을 신뢰합니다. 어떤 사람과도 아주 능숙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셀카를 찍자는 요청에도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하며 자기편은 물론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과도 얼마든지 토론할 준비가 돼 있는 정치인입니다. 실제로 경제부 장관 시절 프랑스 남부 에로(Hérault) 지역의 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정부 정책을 맹렬히 비판하는 시위대와 즉석에서 열띤 토론을 벌인 일화는 유명합니다.

시위대는 마크롱이 앞장서 추진하려던 개혁 입법을 개악이라 비난하며 시위를 벌였는데, 한 프랑스 신문은 마크롱이 시위대를 대할 때 처음에는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더니, 나중에는 평정심을 잃은 모습이었다고 썼습니다.

시위대 가운데 한 명이 “저는 장관님처럼 비싼 양복 사 입을 돈도 없다.”고 비아냥거리자, 마크롱은 화를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습니다.

“그런 티셔츠 입고 그런 식으로 배배 꼬지 마세요. 양복 살 돈이 없으면 지금 이럴 시간에 일을 해서 돈을 벌면 되잖아요.”

대선 선거운동 기간에도 마크롱은 불필요한 말실수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1차 투표를 두 달여 앞둔 어느 날, 마크롱은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반인도적인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해 프랑스인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같은 달, 이번에는 반대로 동성혼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너무 큰 수모를 당해 왔다며 이들을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가 좌파 성향 유권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경험이 부족한 젊은 정치인이 각본 없는 ‘실제 상황’에서 부족한 면모를 드러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크롱에 관한 또 다른 책을 쓴 니콜라 프리세뜨는 오히려 정반대로 그런 ‘실제 상황’이 사실은 치밀하게 준비된 것으로 그런 마크롱의 모습에 지지율은 더 올랐다고 분석합니다.

“극좌 진영에서는 마크롱이 쩔쩔매는 듯한 모습을 보며 마크롱이 내세운 가짜 진보가 한계를 드러냈다고 좋아할지 모르지만, 그런 마크롱의 모습은 중도 우파 성향 유권자들의 호감도를 끌어올리는 데 톡톡히 한몫 했다.”

마크롱은 이른바 좌파의 역린을 건드려 우파 유권자의 지지를 얻었다. – 니콜라 프리세뜨 –

에마뉘엘 마크롱이야말로 그가 하는 주장과 그 주장이 나온 맥락을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 정치인입니다. 풀뿌리 정치 운동을 주창한 투자은행 경력의 정치인. 프랑스의 엘리트 교육 시스템이 길러냈지만, 기존 체제 개혁을 부르짖는 정치인. 자기 자신만의 영역이 누구보다 뚜렷하지만, 또 동시에 어떤 사람과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그렇다고 누군가에 의지해야 하는 사람은 또 아닌 인물이 마크롱입니다. 학창시절 친구 마구에는 마크롱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친구죠. ‘이게 진짜 마크롱’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마크롱 아닐까요?”

 

어떤 대통령이 될 것인가?

앙마르슈가 닻을 올린 첫날부터 마크롱은 새로운 정치 운동, 개혁의 길은 다른 무엇보다도 다 같이 함께 걸어가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앙마르슈는 중요한 결정을 가능한 한 모두의 의견을 모아 민주적으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정치 운동에서 마크롱은 특히나 “우리”를 강조했습니다. 2008년 오바마 대통령이 거둔 “Yes we can”의 성공을 본떠 정치인과 유권자가 다 함께 변화를 만들어간다는 점을 강조한 겁니다.

마크롱은 대선 이후 6월에 치러질 의회 선거에서 앙마르슈의 후보 절반을 기존 정치에 때 묻지 않은 정치 신인으로 채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국회의원 후보를 남녀 동수로 내겠다는 약속도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마크롱이 대통령 되면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리라 기대하는 건 아닙니다. 마르끄 앙데벨드는 우선 앙마르슈가 수평적 민주주의를 혁신적으로 구현해낸 대단한 조직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에마뉘엘 마크롱 개인이 항상 최종 결정권을 갖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앙마르슈도 결국에는 대단히 수직적인 구조로 움직입니다. 선거 운동을 이끄는 매니저들이 없는 대신, 마크롱 본인의 인간관계가 총동원돼 조직이 굴러갑니다. 마크롱이 사실상 완전히 장악한 조직인 셈인데, 권력의 정점에 유능한 개인이 있어야 한다는 식의 엘리트 의식이 마크롱에게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것도 여기에 한몫 합니다.”

2015년 7월, 한 시사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마크롱은 프랑스 정치의 근본적인 한계와 불완전성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군주제를 택하지 않는 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한계일 겁니다. 프랑스인들이 다시 한번 왕의 통치를 받고 싶어 할까요? 당연히 아닐 겁니다. 프랑스 혁명으로 왕을 제거하고 난 뒤 찾아왔던 일종의 공허함과 그로 인한 공포가 있었죠. 감정적인 측면도 있고 상상 속이었지만 모두가 어느 정도 공유했던 그 공허함을 채우고자 우리가 어떻게 했습니까? 어느 정도까지는 다른 사람을 왕의 자리에 앉히려 했던 측면이 없지 않죠. 역사가 흘러 우리는 결국 왕의 신분은 아니지만, 왕이 하던 기능을 맡아서 해달라며 대통령을 뽑아 권력을 위임하게 됐습니다.”

알랭 맹은 마크롱이 전보다 훨씬 더 직설적이고 냉소적이며 세련된 언어로 말하게 됐다고 말합니다.

마크롱이 너무 어려서 유약한 대통령이 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죠. 마크롱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립니다. 오히려 철권통치에 가까울 만큼 권력을 철저히 휘두를 거예요. 그만큼 정치적이고, 대통령 자리만 보고 달려온, 동시에 아주 냉소적인 사람이니까요. 어떻게 보면 그래서 다행이죠. 아무튼, 그가 우유부단하거나 유약한 대통령이 될 거라는 걱정은 저는 전혀 안 합니다. – 알랭 맹 –

앤 풀다는 외곬에 가까울 정도로 한 가지 목표에 매진하는 그의 성향 덕분에 그가 대통령직을 잘 수행하리라 평가합니다.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논공행상 때문에 발목 잡힐 유형의 정치인이 전혀 아녜요. 자기 자신에 유리한 방향으로 주어진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목표를 이루고 나서는 필요하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그 제도를 해체하고 다시 짤 수 있는 사람입니다.”

경제부 장관 시절 마크롱의 개혁 법안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대규모 집회·시위가 잇따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반대에 더는 굴복하지 않고 꿋꿋이 개혁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념적으로 크게 갈라져 있는 데다 불확실성이 그 어느 때보다 큰 대선인 만큼, 당선되더라도 공약을 그대로 이행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마크롱이 실패를 추스르는 데 미숙하다는 점은 마크롱을 지지하는 이들도 대체로 인정하는 약점입니다. 마크롱은 지금껏 인생을 살아오면서 뼈아픈 실패나 큰 좌절을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랑제꼴 중에도 최고로 꼽히는 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e Superieure)에 떨어졌다지만, 그러고 나서 국립행정학교에 갔기에 이를 실패라고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행정부 최고 책임자는 무척 힘든 일일 겁니다. 마크롱은 자신이 프랑스 정치사에 유례가 없는 실험을 성공적으로 해냈다고 믿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로 항상 존재했던 이념적 분열을 뛰어넘어 사상이 다른 사람들을 한데 묶는 시도가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자평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앙마르슈는 대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이미 불협화음을 내며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오래된 반목을 통합하고 치유하는 일은 그렇게 단시간에 가능하지 않죠. 게다가 마크롱이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앙마르슈는 여전히 국회에서 다수당에 한참 못 미치는 중소 여당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이원집정부제인 프랑스에서 여소야대 정국을 운영하는 건 훨씬 더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마크롱은 자신이 지지 세력을 결집하고 국민과 직접 소통하는 방식이야말로 프랑스 정치의 앙시앙 레짐을 타파하는 새로운 방법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마린 르펜은 좌우를 막론한 모든 유권자에게 보호주의 정책을 내세우고 포퓰리즘을 불사하며 호소하고 있습니다. 마크롱도 마찬가지로 좌우를 막론하고 모든 유권자에게 지지를 호소하되, 보호주의 대신 세계화와 열린 국경, 자유 무역을 주창하며 그를 통해 프랑스가 더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마크롱이 프랑스 대통령으로 선출되면, 이는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프랑스 정치의 새로운 장을 여는 셈이 될 겁니다. 군주제는 사라진 지 오래지만, 아주 강력한 정치 지도자가 프랑스를 이끌어갈 것입니다. (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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