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주택에 대한 보편적인 권리, 그저 유토피아적 이상일까요?
2017년 4월 27일  |  By:   |  세계, 정치, 칼럼  |  No Comment

우리가 권리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어떻게 그 자리에 올랐을까요? 일례로 무상 중등 교육은 오늘날까지도 뜨거운 논쟁의 주제입니다. 중등 교육이 의무화되기 전까지는 아이들도 일을 하는 것이 당연시되었습니다. 무상 중등 교육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아이들을 학교로 보내는 것이 자기 결정권과 시장 질서를 해친다고 주장하죠. 돈을 원하니까 일을 하는 것이라면서요.

그렇다면 영국에서 나라가 모두에게 주택을 보장하는 상황을 상상해봅시다. 주택에 대한 권리가 보편적 권리가 된 세상이죠. 근거는 무상 교육 찬성 논리와 같습니다. 영국의 모든 어린이에게 풍요롭게 살아갈 권리, 아니 풍요롭지는 않더라도 추위와 학대, 범죄의 공포에서 벗어나 밤잠을 잘 수 있는 권리가 있으므로 주택이 필요하다는 논리죠.

물론 19세기 말 보편적 교육에 반대하던 사람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시장의 자유를 근거로 반대를 부르짖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우리가 극도로 비인간적인 상황을 막기 위해 시장의 자유를 점차로 제한해 온 것은 엄연한 사실이죠. 우리 사회가 수용한 노예제 폐지, 최저임금제 도입, 이민 제한, 독점 제한 등이 모두 그 예에 해당합니다. 즉 시장의 자유라는 것도 절대불변의 진리는 아니라는 것이죠.

오늘날 영국 사회의 주거 불평등은 인간의 존엄을 해치고 있습니다. 굴다리 아래서 추위에 떨며 죽은 듯이 앉아 물건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는 노숙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죠. 약자를 보호하라고 뽑아놓은 의원이 길에 거지가 너무 많다며 불평하는 트윗을 올린 일도 있었죠. 노숙처럼 드러나지는 않지만 거처가 마땅치않아 불안정하고 비인간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살던 곳에서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삶은 곧 멀쩡히 다니던 학교나 직장, 속해있던 공동체를 언제 잃을지 모르는 삶이기도 합니다.

무상 주택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언제고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영국인들은 뭐든지 공짜로 나누어주는 것에 정서적인 반감을 갖고 있는 듯 합니다. 물론 2007년부터 2011년 사이에 영국 정부가 은행들에 1조 파운드 이상의 구제 금융을 지원한 것은 아무렇지 않게 여기지만요. 정부가 2016년 신규 주택 4만 채를 짓는데 14억 파운드 정도가 소요된다고 발표했으니, 1조 파운드면 3천만 여 채의 집을 지을 수 있는 돈입니다. 돈 많고 무책임한 이들에게 천문학적인 액수를 지원하는 것은 괜찮고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제공하는 것은 괜찮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정말 은행들이 정부 지원으로 구제된 상황이 모두가 집세 걱정없이 사는 세상보다 낫다고 느끼는 것일까요? 도시 곳곳에 지어지는 호화 아파트 덕분에 집세는 점점 치솟고, 부자들은 평생 쓸 일 없는 주택을 투자 목적으로 여러 채씩 사들이고 있습니다. 집주인들에게 주어지는 세제 혜택은 결국 납세자들의 주머니에서 나가는 것이죠.

어쩌면 우리는 집이 무료라면 다들 열심히 일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거 불평등이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조차 안정적인 삶을 이어나갈 수 없는 상황을 뜻하죠. 현금이나 런던에 사는 가족, 친구가 없는 사람은 돈을 더 주는 일자리를 찾아서 이사를 갈 수도 없고, 당장 집세를 내느라 더 좋은 기회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상 주택이 도입되면 나라의 부는 보다 공평하게 분배될 것이고, 일자리도 자연스럽게 런던 이외의 지역으로 퍼져나갈 것입니다. 주택 문제 해결에 들어가는 정부 예산도 다른 곳에 쓸 수 있고, 수도권 주민들이 집세에 소비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돈 역시 다른 곳에 쓰이면서 소비 진작과 세수 증대의 효과를 가져올 겁니다.

주택에 대한 권리를 인권으로 인정하게 되면, 진짜로 불공평한 보상을 받고 있는 사람(예를 들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부모로부터 집을 물려받은 사람)도 더 잘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모두에게 집이 주어지는 세상은 경쟁의 장을 공평하게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상류층만이 덕을 보니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는 무보수 인턴십 같은 것도 사라지고, 가난한 학생들도 비슷한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겠죠. 노동 계급도 마침내 중산층처럼 당장 돈이 되는 일 대신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집을 둘러싼 우리의 생각 자체도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안정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되, 살다보면 주거 형태가 달라질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유연하고 실용적인 방향으로 말이죠.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두 생존과 존엄성에 대한 권리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운이 아닌 나의 의지에 따라 삶을 꾸려갈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주장에 구멍이 있거나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아직도 주거에 대한 권리가 보편적 권리로 자리잡지 않은 현실이 제게는 더 충격적입니다. 유토피아적 이상이라고 생각하세요? 제게는 그저 더 공정한 세상처럼 보입니다. (가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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