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역사를 인정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2017년 1월 10일  |  By:   |  세계, 칼럼  |  No Comment
  • 소설가 앤젤라 플러노이(Angela Flournoy)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호주에서 열린 세계작가회의 참석을 계기로 저는 호주의 행사 시작 의례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패널 토론에 앞서, 긴 비행과 시차로 지친 200여 명의 참석자 앞에 등장한 자원봉사자는 “원래는 호주 원주민들의 땅이었던 이곳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는 말로 운을 뗐습니다. 단숨에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의 시간을 제국주의 이전으로 되돌리는 인사말로, 제게는 아주 생소한 경험이었습니다. 호주에서는 이 의례를 “국가의 인정(acknowledgement of country)”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호주에 머무른 한 달 동안, 이런 식으로 행사가 시작된 것이 최소한 십수 번이었습니다. 때로는 지역 원주민 커뮤니티에서 나온 사람이 직접 환영 인사를 하기도 했죠. 주류 행사에서까지 이런 의례가 시작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만, 호주 사회 전체로 보면 상당히 오래된 전통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 의례는 작은 강당에서부터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소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이 의례를 여러 차례 겪다 보니, 동행한 어머니와 함께 즉석에서 표정만으로 인사말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진심이 느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떤 사람들의 인사는 말 그대로 형식적인 의례처럼 들리기도 했죠. 어떤 연설은 기내 안전 교육처럼 무미건조했습니다. 어떤 연사는 이 땅을 어떻게 도둑맞았는지,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그 땅을 되찾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호주에서 참석했던 자리 중 비백인의 비율이 가장 높은 자리였기 때문에 백인이었던 연사가 이 정도 청중이라면 진실을 감당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방문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오니, 마침 미국에서도 행사를 시작하는 방식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경기 시작 전 국가가 나올 때 무릎을 꿇은 자세로 경찰 폭력에 항의한 풋볼선수 콜린 캐퍼닉 덕분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여론은 극과 극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영웅이자 행동하는 지성, 누군가에게는 멍청한 기회주의자였죠. 저는 왜 이런 문제로 다들 이렇게 난리일까 생각했습니다. 연설도, 국가 연주도 없이 그냥 바로 풋볼 경기를 시작하면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했죠. 하지만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서 연설을 듣거나 공연을 보는 것은 문명이 가치를 공유하는 방식입니다. 이와 같은 의례는 공동체 의식을 함양할 수도 있고, 트럼프 유세 현장에서처럼 분노와 반감을 부추길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트럼프 당선 이후 백인우월주의자와 혐오 발언을 일삼는 사람들이 두드러지기 시작했죠. 이런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어떤 단어를 사용하는가, 어떤 전통을 유지해 나가는가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역사에 복잡한 구석이 있다는 점을 깔끔하게 인정하는 짧은 연설로 모든 행사를 시작하는 호주의 “국가 의례”는 놀랍습니다. 미국에서도 이를 시도해보면 어떨까요? 이런 의례가 호주 사회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저는 호주의 작가들에게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원주민이 아닌 작가들로부터 주로 “그냥 립서비스 같은 짓”이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생색만 낸다는 거였죠. 하지만 원주민 작가들의 답변은 조금 더 복잡했습니다. 호주 정부의 실망스러운 정책적 행보와 관계없이, 모든 행사를 과거에 대한 인정으로 시작하는 것은 원주민 전통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의례가 중요한 대화의 기초 작업이 될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한 작가는 미국 남부에서도 비슷한 의례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버지니아 주 샬롯츠빌을 방문했을 때의 분위기를 떠올려봤습니다. 행사에 앞서 주최 측이 땅을 빼앗긴 지역 원주민들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역사적으로 지역 발전에 크게 기여한 흑인 노예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원주민은 아니지만, 흑인 노예의 자손인 저 같은 사람은 이런 의례가 불완전하다고 느끼겠죠. 미국 내 한 지역의 역사만 봐도 이렇게 복잡한데, 국가적인 의례에 어떤 부분을 담고 어떤 부분을 뺄지는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요?

호주의 경우 이러한 의례가 과거의 국가적 죄악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한때 폭력적으로 제거되었던 공간의 맥락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임을 저는 차차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블랙 스미스소니언”이라 불리는 국립 아프리칸아메리칸 역사문화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이런 맥락의 회복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흑인 노예들의 손으로 지은 백악관 바로 근처에 위치한 이 박물관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흑인들이 기여한바, 흑인들의 투쟁과 승리에서부터 전통과 문화의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세세히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흑인들이 사용하던 머릿기름같이 일상적인 물건까지 전시품목에 포함한 큐레이터들의 마음을 짐작해보곤 합니다. 맥락은 이처럼 한 집단에 인간성이라는 것을 부여하죠.

미국도 새로운 국가 의례를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소외당한 존재들도 포함하고, 그들의 전통을 존중하는 내용을 담아서 말입니다. 호주처럼 직접적인 방식으로 할 수도 있지만, 노래나 춤처럼 간접적인 형식을 채택할 수도 있겠죠. 모든 상징적인 제스처가 그렇듯, 이런 뜻으로 만들어진 의례도 복잡하고 불완전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을 소외시키는 수사가 주류로 떠오르고 있는 미국의 현실을 생각할 때, 시도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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