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권의 부침
2016년 12월 8일  |  By:   |  한국  |  2 Comments

옮긴이: 국회가 내일 9일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투표에 부칠 예정입니다. 해외 언론들도 탄핵 소추에까지 이른 박근혜 게이트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가운데 AP 통신이 박근혜 정권의 부침을 간략하게 정리한 글을 옮겨 소개합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비롯된 박근혜 게이트 이전에 박근혜 정권에서 일어난 굵직굵직한 사안을 정리한 글입니다. 뉴욕타임스와 폭스 뉴스를 비롯한 많은 언론이 이 기사를 전재했습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국정농단 사태를 가장 정확히 표현하는 단어로 ‘박근혜 게이트’를 골라 썼음을 미리 밝힙니다. 원문의 표현은 ‘political scandal’로 ‘박근혜 게이트’와는 수위가 다릅니다.

이번 주 한국 국회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여부를 투표에 부친다.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아준 한국의 보수층 유권자들은 무엇보다 박근혜의 아버지인 박정희가 수십 년 전 이룩한 경제성장을 그리워하는 이들이라는 분석이 많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부패한 인물에게 국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사실상 넘겨주었다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이번 스캔들이 불거지기 전까지 박근혜 정권의 4년을 보더라도 계속된 북한과의 대치, 세월호 참사, 언론의 자유와 노동권 억압 등 여러 가지로 순탄치 않았다.

정치인 박근혜의 부상과 박근혜 정권의 부침을 정리했다.

 

독재자의 딸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어떤 사람들은 박정희를 그저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억압하고 투옥했으며 자유를 짓밟은 무자비한 독재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싫어하지만,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 경제를 일으킨 영웅으로 추앙하는 이들도 많다. 1961년부터 1979년까지 18년간 집권하는 동안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배 높아졌다.

1979년 아버지 박정희가 암살된 뒤 박근혜는 대중의 시야에서 오랫동안 사라졌다. 그러다 외환 위기가 불어닥쳐 한국 경제도 위기에 빠져 사람들이 과거의 빠른 경제 성장을 그리워하던 1990년대 말 박근혜는 오랜 잠적을 청산하고 정치에 입문한다.

국회의원 박근혜는 이내 한국 보수의 상징이 되었고, 선거에서 잇달아 소속 한나라당의 선전을 이끌며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2013년 2월, 박근혜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어렸을 때 살았던 청와대로 돌아온 것이다.

 

핵무기를 든 북한과의 대치

박근혜 대통령의 5년 임기가 시작되기 며칠을 앞두고 북한은 3차 핵실험을 했다. 유엔이 대북 제재를 한층 강화하자 북한은 서울과 워싱턴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권 초기에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면 대북 지원을 하겠다며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다. “통일은 대박”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통일이 가져올 경제적인 혜택을 언급하기도 했고, 한국 정부와 사회가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정책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북한은 미국의 체제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올해만 두 차례 더 핵실험을 했다. 그러면서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서는 원색적인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도 마침내 강경 노선으로 선회했고 남북한 경제 협력의 마지막 상징처럼 남아있던 개성공단을 폐쇄했다. 지난해에는 비무장지대에서 북한의 지뢰에 남한 병사 두 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한 뒤 양측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기도 했다.

 

세월호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해 300명 넘는 승객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가운데 대부분이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세월호 참사는 박근혜 정권에 치명타를 입혔다.

한국전쟁 이후 현대사에서도 손꼽을 만한 대형 참사로 기록될 세월호 참사에 전 국민이 애도를 표했고, 공공 안전은 다시 한번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제는 박근혜 정권이 세월호 사고에 무능하게 대처했다는 데 있다. 정부가 더욱 신속하게 대응하고 체계적으로 구조 작업을 지시했다면 훨씬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는 비판이 사고 초기부터 제기됐다.

세월호가 가라앉은 사고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도 문제가 되었다. 박 대통령은 사고가 났다는 보고를 받은 지 일곱 시간이 지난 뒤에야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많은 승객이 여전히 배 안에 갇혀 구조를 기다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분초를 다투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일곱 시간이 지난 뒤 재난안전대책본부를 찾은 박근혜 대통령은 구명조끼를 입은 학생들을 왜 발견하는 게 어렵냐고 묻는다. 구조 상황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청와대는 일곱 시간 동안 박 대통령이 전화와 서면 보고로 시시각각 상황을 보고받았고 구조를 지휘했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대통령이 정확히 어디서 무얼 했는지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는 여론이 매우 높다. 몇몇 국회의원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당시 미용 시술을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표현의 자유 후퇴

박근혜 대통령은 의사 결정을 명확하게 하지 않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며 아버지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억압적인 통치 스타일을 드러내 비판을 받았다.

지난해 한국 검찰은 일본 산케이 신문 서울 지국장을 기소했다.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일곱 시간에 대한 의혹을 기사로 쓴 데 대해 박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였다.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며 논란은 일단락됐지만, 박근혜 정권의 언론관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외신들은 지적했다.

박근혜 정권은 또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해 비판을 샀다. 아버지 박정희의 독재를 미화하려는 데 목표가 있다는 의심이 끊이지 않았다.

헌법재판소는 소수 좌파 정당인 통합진보당을 강제로 해산하라는 결정을 내렸고, 북한을 찬양하는 등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재미 한국인 여성 신은미 씨를 추방했다.

북한과의 대치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표현의 자유는 언제나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가 첨예하게 맞서는 논쟁거리였다.

 

살아나지 않은 경제와 정치적 스캔들

경제 살리기에 매진하겠다던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가 통치하던 시절의 경제 성장을 재현하는 데 실패했다.

가계 부채와 청년실업률은 계속 치솟고, 박정희 정권의 비호와 특혜를 받으며 한국 경제 성장을 이끌었던 재벌들도 경제 위기를 피하지 못하고 국가 경제를 반전시킬 만한 돌파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박근혜 게이트는 박근혜 정권에 결정타가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사실상의 퍼스트레이디였던 시절부터 각별히 따랐던 것으로 알려진 고 최태민 씨의 딸 최순실 씨가 대통령과의 친분을 이용해 국정을 농단하고 수많은 이익을 취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민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고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고, 오는 9일로 예정된 탄핵 투표 표결까지 이르렀다.

최순실 씨는 아무런 공식 직책도 맡지 않았음에도 각종 정부 정책과 인사에 개입하고 대기업들로부터 돈을 뜯어내 착복한 혐의를 받고 있다. (AP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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