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팩트’라는 말이 의미를 잃은 시대 (1)
2016년 10월 26일  |  By:   |  세계, 정치, 칼럼  |  No Comment

“트럼프가 이기면 오바마가 계엄령을 선포할 예정.”

최근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이런 문구가 보여 클릭해보니 “위기에 빠진 나라(Nation in Distress)”라는 페이지로 연결되었습니다.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극도로 당파적인 성격의 페이지였습니다. 포스트를 클릭했더니 “americasfreedomfighters.com”이라는 웹사이트로, 다시 “데일리 쉬플(Daily Sheeple)”이라는 비디오 블로그로 연결되었고, 여기서는 “내셔널 인콰이어러(National Enquirer)”지를 인용해 힐러리 클린턴이 1990년대에 캘리포니아의 한 호텔에서 레즈비언 밀회를 즐겼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어디에서도 트럼프 당선 시 오바마가 계엄령을 선포할 것임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2005년 코미디언 스티븐 콜베르는 “진실스러움(truthiness)”라는 말을 만들어냈습니다. “딱 보면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느낌”을 일컫는 말로, 여전히 공화당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우익 논객 러시 림보, 빌리 오라일리, 글렌 벡 등을 풍자하기 위한 용어였죠. 하지만 이번 선거 기간, 사실과 거짓을 구분할 책임도 없는 목소리들에 힘을 실어주는 소셜미디어상에서 “진실스러움”은 당파 싸움의 무기로 완전히 자리 잡았습니다.

최근 나온 한 버즈피드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극단 우파 페이스북 페이지 세 곳에 올라온 포스팅의 38%, 좌파 성향 페이지 포스팅의 19%가 거짓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보고서는 “세계 최대의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에서 독자를 끌어모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팩트 기반 보도를 피하고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거짓 정보를 활용해 정치적 편향에 영합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정치판에서 “공유”와 “좋아요”로 돌아가는 페이스북이 정크푸드라면, 팩트체크에 기반을 둔 저널리즘은 푹 데친 시금치 같은 존재입니다. 최근 몇 년간 팩트체크는 저널리즘 도구로서 상당한 위치를 확보했습니다. 2008~2012년, 팩트체크 기사의 수가 3배 늘어났다는 연구 결과가 있을 정도죠. 그리고 이번 대선 정국에서는 분명히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의심스러운 정보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팩트체크라는 개념에 대한 미국인들의 시선은 긍정적인 편입니다. 10명 중 8명이 “팩트체크는 좋은 것”이라 답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설문 결과를 2015년 당시 미국인의 29%, 공화당원의 43%가 오바마를 무슬림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CNN 설문 조사 결과와 나란히 놓고 보면 의아해집니다. 결국, 미국인들은 팩트체크가 자신의 관점을 재확인시켜줄 때만 이를 인정하고 좋아한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쟁터가 페이스북으로 옮겨오기 전부터 비슷한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라디오 방송이었습니다. 매주 1,300만 명이 청취하는 프로그램의 진행자 러시 림보는 최근 방송에서 “팩트체크를 하는 언론사가 모두 당파적이기 때문에 팩트체크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죠. 팩트체크란 자신의 의견을 공정하고 객관적인 진실로 포장하려는 주류 언론의 도구일 뿐이며, 이런 것을 믿으면 그들에게 힘을 더 실어줄 뿐이라고 비난의 날을 세웠습니다.

언론에 대한 불신은 보수 진영의 오랜 특성이나, 이번 대선 정국에서는 더욱 어두운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 주말 클리블랜드의 유세 현장에서는 트럼프 지지자 두 사람이 나치 독일이 사용했던 “거짓 언론(lügenpresse)”이라는 단어를 들고 나왔습니다.

캐나다 언론 <토론토 스타>의 워싱턴 특파원 다니엘 데일은 지난 9월부터 트럼프의 발언 내용에 관해 사실 여부를 따졌습니다. 그는 매일매일 엄청난 양의 거짓말이 쏟아진다며, 트럼프 담당은 차원이 다른 업무라고 말합니다. 데일에 따르면 3번에 걸친 TV 토론에서는 트럼프가 104번 거짓말을, 클린턴은 13번 거짓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가 트위터 계정에 올리는 팩트체크 자료는 인기가 많아 높은 리트윗 수를 기록하지만, 동시에 적대적인 반응도 많습니다.

이번 선거가 끝나면 진지하게 자기 성찰을 해야 할 사람이 많습니다. 트럼프의 부상에서 보수 언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솔직한 생각을 밝혀온 보수파 라디오 진행자 찰리 사익스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문지기나 심판을 다 없애버린 셈이에요. 20년 동안 우리가 리버럴 주류 언론을 악마화해왔죠. 물론 그럴 만한 근거도 충분히 있었지만, 어떤 시점엔가는 우리가 믿을 만한 언론의 신뢰도까지 모두 박살 내버린 것은 아닌가 돌아봐야 한다는 거예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이런 의견을 밝힌 사익스는 올해 말,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뉴욕타임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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