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수학이 나를 불렀다(The Man Who Knew Infinity)
2016년 10월 25일  |  By:   |  과학  |  No Comment

1913년 1월, 인도 소인이 찍힌 커다란 봉투가 영국 캠브리지에 도착했습니다. 받는이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인 G.H 하디(Hardy)였습니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저는 마드라스의 항구 세관에서 서기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대학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만…”

그러나 이제 갓 25세가 된 스리니바사 라마누잔은 아홉 장의 종이에 단정한 필기체로 하디의 논문을 반박하는 결과를 포함해 발산 수열과 감마 함수의 음의 값 등 놀라운 내용들을 가득 채웠습니다. 하디는 처음에는 이 편지를 어떤 괴짜가 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의 동료 두 명은 라마누잔이 보낸 편지를 이미 무시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에 쓰인 정리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또 자신의 동료 존 E. 리틀우드와 상의한 뒤, 그는 이 편지가 “최고 수준의 수학자만이 쓸 수 있는 내용으로… 이 결과들은 상상만으로는 절대로 생각해 낼 수 없는 내용이며, 따라서 모두 사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편지는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한 젊은이의 머릿속에서 출발한 비상한 계산 결과들 중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라마누잔은 수학 분야에서는 드문, 낭만적 비극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너무 가난했기에 자신의 공식을 쓸 종이를 살 수 없었고, 흑판에 분필로 쓴 후 팔꿈치로 지우는 식으로 대부분의 계산을 해치웠습니다. 때로 이미 한 번 쓰고 버려진 종이 위에 붉은 잉크로 다시 계산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캠브리지 대학으로 초청된 그는 놀라운 결과들을 발표하였고 최고의 수학적 영예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32세의 나이에 그는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능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세상을 떠난 라마누잔은 결핵이 자신의 몸을 좀 먹는 동안 650개의 정리가 든 마지막 노트를 남깁니다. 그를 담당한 의사는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물을 흘리기에는 너무 슬픈 비극이다.”

로버트 카니겔은 이런 특별한 삶을 역시 특별한 책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책은 전기 작가가 보일 수 있는 하나의 모범적인 예입니다. 그는 한 사람을, 그를 둘러싼 사회적 맥락과 또 그의 전문 분야까지를 다루면서도 독자들이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는 백과사전적 치밀함과 섬세함, 그리고 대상에 대한 순수한 연민을 최상급 글솜씨로 명료하게 기술했습니다. “무한대를 본 남자(The Man Who Knew Infinity)”는 대상에 대한 애정과 명확한 표현이 만난 걸작입니다.

카니겔은 라마누잔의 가난한 어린 시절을 생생하게 (“구름들은 서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나요?”라는 어린 시절의 라마누잔이 한 질문을 이야기하며), 그의 강한 의지를 가진 어머니와 뛰어난 학창시절과 함께 묘사합니다. (어떤 선생님은 그가 “최고점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비이성적인 직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종교적 신념 또한 강했습니다. (라마누잔은 언젠가 “수학은 신의 생각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열 여섯 살 때 라마누잔은 조지 슈브리지 카가 5,000 개의 수학 공식을 모아놓은 책을 구했고 이 책 때문에 수학에 빠져들었습니다. (이 책은 후에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책이지만 라마누잔 때문에 유명해졌다”는 평을 듣습니다.) 그는 다른 분야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이때문에 대학 시험에 두 번이나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후원해줄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으며 수 년 간의 무시와 가난을, 흑판과 공책에 끝없이 수학 공식을 써가며 버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캠브리지에 보낸 편지가 그의 삶을 바꾸게 됩니다.

어두운 피부색과 작은 키의, 수두 자국의 얼굴과 번득이는 눈의 인도 남부 타밀 족 출신 라마누잔과 트리니티 칼리지의 명예회원이며 크리켓 선수이자 자신의 순수 수학이 가진 “무용성(uselessness)”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완벽주의자 하디의 공동연구는 그것이 이상해 보이는 만큼이나 성공적이었습니다. 일차 대전 중에도 이들은 계속해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하디는 동업자의 천재성이 가진 거친 면을 가다듬었고, 그 결과가 학계에 받아들여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카니겔은 라마누잔이 현대 수학과 동떨어져 독학했기 때문에 저지른 실수들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라마누잔은 계속해서 후대에 결국 옳은 것으로 증명된 놀라운 직관적 결과들을 발표했습니다. 그의 사후 여러 뛰어난 학자들이 그가 남긴 노트를 연구했고 아직도 그 작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라마누잔의 업적은 현대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컴퓨터 과학, 암호학, 입자물리학, 플라스틱, 통계 역학, 우주 여행 등에서 그의 정리가 쓰입니다.

카니겔은 복잡한 수학이 포함된 라마누잔의 업적을 자세히 설명하기를 꺼리지 않습니다. 라마누잔은 무한 수열, 베르누이 수, 모듈러 방정식, 연분수, 타원 함수 분야에 기여했고 오일러 상수, 자코비 다항식에도 어느 정도 기여했으며 목 세타 함수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열중했습니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런 수학적 내용에 겁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카니겔은 이 내용들을 자신의 언어로 상식적으로 간단하게 풀어줍니다. 몇몇 일화들은 라마누잔의 천재성을 보여줍니다. 그는 캠브리지의 첫 수업에서 교수로부터 이 결과에 무언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라마누잔은 칠판으로 가 그 교수가 아직 증명하지 못한, 그리고 라마누잔 본인은 그런 것이 있는지도 알지 못했던 결과를 칠판에 적습니다. 다른 유명한 일화에서 하디는 요양원에 누운 라마누잔을 찾아갔을 때 자신이 타고 온 택시의 번호가 1729였고 이 숫자가 별 특징이 없는 숫자라고 말합니다. 라마누잔은 즉시, “아니에요, 하디. 이 숫자는 매우 흥미로운 숫자입니다. 이 숫자는 두 가지 방법으로 두 정수의 세제곱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작은 숫자에요.” (역자 주: 1729=10^3+9^3=12^3+1^3)

이는 순간적인 직관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라마누잔은 이 문제를 오랫동안 생각해 왔습니다. 카니겔은 라마누잔의 성공이 수많은 잘못된 시도, 그리고 엄청난 노력과 시간을 들인 결과라는 사실을, 소위 노력으로 영감을 뒷받침했음을 조심스럽게 강조합니다. 카니겔 역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는 면에서 그에 못지 않습니다. 그는 책의 서두에 남부 인도 작은 마을에 사는 브라만의 삶을 완벽하게 묘사합니다. 또한 이 책에는 근거 없이 쓰여진 의견도 없습니다. 카니겔이 수치심을 언급했다면, 그는 심리학자의 의견을 인용했을 겁니다. 카니겔은 라마누잔이 영국에서의 느꼈을 외로움을 이해하기 위해 당시 영국에 유학온 인도 학생들의 역사를 조사했으며, 1인칭 관점으로 쓰여진 글과 영국 정부의 보고서, 그리고 마하트마 간디의 자서전까지 다룹니다. 또한 하디가 능숙했던 크리켓을 상세히 묘사하기도 하고, 마드라스 항구 세관의 역사와 캠브리지 대학의 졸업 조건을 설명합니다. 당시 “활동적이고 의욕적인 정신”의 인도를 억압해야 했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영국의 소설가 새커리를 인용하고, 카스트 제도를 설명하기위해 영국의 정신과의사 카스테어를 인용합니다. 마드라스의 지방지인 더 힌두(The Hindu)의 1889년 논설위원을 인용해 인도인이 가진 성격적 부족함을 설명하고, 심지어 식민지에서 돌아온 이들이 빅토리아 시대 런던에서 겪게되는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레너드 울프를 인용합니다. 이 내용들은 모두 흥미롭게 읽히며 전혀 지겹지 않습니다. 라마누잔은 평소 손금을 보며 자신이 35세를 넘길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처럼 종교적인 사람이 스스로 가진 확신은 충분히 강력한 효과를 가졌을 것입니다. 라마누잔은 언제나 수학을 신의 선물로 생각하고 있었고 자기 가문을 수호하는 여신 나마기리(Namagiri)가 꿈에서 자신에게 그 능력을 부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카니겔은 라마누잔이 얻은 병의 원인을 그의 외로움과 방치,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기후에서 제대로 음식을 섭취하지 못했던 습관 때문으로 돌립니다. 결핵은 영국에 유학온 인도 학생들이 자주 걸리는 병이었지만, 라마누잔은 수학에 몰두한 나머지 전시 물자가 부족한 시기에 채식주의에 맞는 음식을 잘 찾지 못해 더 병을 키웠습니다.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독자들을 더욱 안타깝게 만듭니다.

하디는 라마누잔이 “심오하면서도 확고한 독창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라마누잔은 또한 인도가 진짜 기원인 ‘아라비아 숫자’와 기원전 2세기 0의 발명, 5세기 아리아바타와 7세기 브라마굽타, 12세기 바스카라로 알려진 고대 인도 수학의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한편, 하디가 그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런 거장들의 뒤를 잇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는 그가 하디에게 접근하지 않았다면 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가난과 식민지주의가 한 가지 이유일 겁니다. 카니겔은 인도가 “세상을 오래 전 떠난 라마누잔을 기리는 것이 새로운 라마누잔을 찾고 키우는 것보다 더 쉬울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인도는 천재를 발견하고 기르기에 라마누잔의 시대에 비해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몇 명 되지 않는 인도 출신의 노벨상 수상자는 모두 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영국인 J.B.S. 홀데인은 이를 “만약 라마누잔의 업적이 영국에서만큼 인도에서도 인정받았다면, 그는 영국으로 절대 이주하지 않았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그는 인도에서 더 많은 업적을 남겼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요. 카니겔은 어느 인도의 점성술사가, 누구의 운명인지 모른 채로, 어느 유명한 이가 그의 정점에서 어린 나이에 사망할 것이라고 묘사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어쩌면 라마누잔은 신이 그에게 허락한 무한대를 이 세상에 모두 남기고 떠난 것일지 모릅니다.

(역주: 11월에 개봉하는 ‘무한대를 본 남자’는 로버트 카니겔이 1991년 출간한 라마누잔 전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한국어판은 ‘수학이 나를 불렀다’라는 제목으로 사이언스북스에서 2000년 출간하였습니다.)

(워싱턴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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