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 스튜어트] 세 번째 문화: 수학의 힘과 영광(2/2)
2016년 8월 9일  |  By:   |  과학  |  No Comment

하지만 수학의 본질과 중요성은 그 실용적 가치나 예술적 특징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학은 그 자체로 지적인 흥미를 불러일으키며 고유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학의 본질을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수학이 수많은 분야로 이루어진,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지식의 합이기 때문입니다. 수학은 실용적이면서도 신비로우며, 정확하면서도 모호하고 심오하며, 자연에 근거하는 동시에 인간의 상상력에도 근거합니다. 수학의 역사는 4,000년에 이르며 수 천년 전에 발견된 사실들도 오늘날 여전히 유효한, 중요한 사실로 인식됩니다. 수학에 관한 연구들은 매년 100만 페이지씩 증가하지만, 이는 모두 하나의 분야로 여겨집니다. 수학 아래에서 완전히 다른 하위분야들은 서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거미줄처럼 연결되며, 이때문에 과거의 버려진 지식이 갑자기 오늘날 필수적인 지식이 되기도 합니다.

사회 문제를 과학의 영역으로 만든 것도 수학입니다. 1835년 벨기에 사람인 아돌프 케틀레는 범죄, 이혼율, 자살, 출산, 죽음, 인간의 키와 몸무게 등에 대한 데이터, 곧 수많은 복잡한 이유와 우연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에 누구도 어떤 수학적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으리라 생각한 수치들에 대한 통계를 발표했습니다. 한 사람을 자살에 이르게 만드는 심적 고통을 수학 공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생각은 어이없게 들립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자살할 가능성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한 생각은 맞습니다. 하지만 케틀레는 다양한 집단의 자살률과 같은 통계적 질문에 집중했고, 벨 커브라는 공통된 패턴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데이터들은 사람들이 집단의 관점에서는 개인의 경우보다 더 예측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통계는 수학이 사회와 인간의 문화에 관여하는 한 가지 측면일 뿐입니다. 수학의 가장 유용한 응용분야는 의학일 것입니다. 의학 연구에서 그 연구의 중요성을 통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연구는 드뭅니다. 세계 금융계 역시 수많은 통계를 필요로 합니다. 때로 수학이 잘못 사용되면 2008년과 같은 금융위기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계의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이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더욱 잘 알아야 하며 이는 수학의 발전에 달려있습니다.

우리 중 다수는 이 제 3의 문화를 학창시절 그저 억지로 배운, 이해할 수 없었고, 좋아한 적도 없고, 다시는 사용하지 않은 무언가로 생각합니다. 수학은 그저 다음 세대 수학 교사를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듯 보입니다. 핵심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창조성이란 존재하지 않고 수백년 동안 바뀌지 않는 내용을 배우는 것 같습니다. 수학 교과서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은 책 뒤에 있습니다. 이런 고정관념은 사실이 아닙니다. 아직 사람들이 얼마나 수학이 우리 삶의 기반을 차지하고 있는지, 우리의 모든 행위에 있어 수학에 우리가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고정관념이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수학”이라는 단어가 그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만을 의미하게 된 것이 안타깝다고 종종 생각합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수학을 자신이 배웠던 방식, 곧 정해진 문제를 반복해서 푸는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산기를 쓸 수 있는 이 시대에 덧셈과 곱셈을 그렇게 반복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만약 덧셈과 곱셈을 하는 방법이 교육의 목적이라면 이 질문은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덧셈과 곱셈을 하는 이유는 이 연산들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이들을 체화해 반사적으로 알게 되지 않으면 우리는 이보다 더 높은 수준의 수학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많은 이들은 어른이 되어 더 높은 수준의 수학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학을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이를 억지로 공부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그들을 그냥 밖에 나가 뛰어놀게 하지 않을까요?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봅시다. 내가 그 아이들의 부모에게 다가가 이렇게 묻는다고 생각해보지요. “당신네 아이들은 수학에 재능이 없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것은 시간낭비에요. 그래서 우리는 수학을 가르치지 않을겁니다. 이 말은 이 아이들이 컴퓨터 프로그래머, 비행기 조종사, 외과의사, 안과 간호사, 전기기술자, 트레이더, 기술자, 의료 통계학자, 배관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아이에게 굳이 수학을 가르치려 노력하지 않아도 이 아이가 수학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 이 아이를 부러 힘들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나는 어떤 부모도 내 말에 동의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화를 내겠죠. 나는 수학이 인간의 모든 가치있는 활동 영역에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수학은 모든 시민이 알아야 할 유용한 지적 도구이며, 또한 아이들을 열 살이 되기 전에 지구상 절반의 직업을 가질 가능성으로부터 차단하는 것이 심하게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위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수학을 전공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직업이 수학 교사 밖에 없다는 이 널리 퍼진 생각이 매우 멍청한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실제로 그렇다면 전세계 정부들은 수학을 배우는 것이 돈 낭비이며 따라서 진작 정규과목에서 수학을 제외 했을 것입니다.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수학 학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훨씬 더 좋은 조건의, 높은 연봉을 주는 자리가 많기 때문에, 오히려 수학 교사가 되는 전공자가 너무 작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다시 수학을 싫어하게 됩니다. 수학 교사 중 많은 이들이 수학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며, 따라서 아이들도 수학을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말이 훌륭한 수학교사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학은 매우 다양한 응용범위를 가지고 있으며 이때문에 수학 전공자들의 직업 역시 매우 다양합니다. 최근의 조사들은 수학 학위를 가진 이들의 연봉이 다른 어떤 전공보다도 높다는 것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인생에서 돈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이 돈을 원한다면, 수학은 매우 좋은 선택입니다.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성격이라면 수학은 지적인 종류의 즐거움을 제공할겁니다. 수학이 수백년 전에 완성되었다는 것은 엉터리 주장입니다. 수학 책에 나오는 모든 문제에 답이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지만,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도 학교에서 배우는 물리나 생물, 영문학이 그 분야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과서는 그 주제에서 가장 단순한 소개를 담고 있는 것이지 모든 내용을 포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수학교과서에는 수학의 모든 내용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유명한 수학자이자 정치가, 교육가인 캐슬린 올러렌쇼 귀부인(dame)은 자서전 “많은 이야기(To Talk of Many Things)”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학창시절 친구에게 대학에서 수학을 배워 새로운 수학을 더 만들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친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뭐하러? 지금도 너무 많단 말이야.”

젊은 캐슬린은 대부분의 우리가 겪지 못하는 어떤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곧, 수학은 전혀 지루하거나 재미없거나 반복적이지 않으며 창조적인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의 활동 중 가장 창조적인 분야일 것입니다. 하지만 수학이 창조적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새로운 수학이 만들어지는지를 볼 때에만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교 수학은 음계를 연습하는 것과 같습니다. 수학 연구는 새로운 곡, 소나타, 심지어 교향곡을 작곡하는 것과 같습니다. 음악의 경우 작곡가가 되지 않고도 훌륭한 음악을 즐길 수 있지만, 수학을 하지 않는 사람이 수학의 아름다움을 느끼기는 쉽지 않습니다. 수학은 관객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최근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림을 그렸을 때 우리는 무언가 창조적인 일을 했다는 느낌을 바로 받게 됩니다. 나 역시 시간이 날 때마다 주로 풍경을 그립니다. 그리고 완성했을 때 때로 작품을 벽에 겁니다. 마추픽추, 물을 박차고 나오는 갈라파고스 돌고래, 이스터 섬의 모아이 등을 벽에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림은 창조성의 결과라기에는 다소 평범한 형태일 것입니다. 내가 작업의 중요성을 기준으로 삼았다면, 나는 곧 나올 시각적 환영에 대한 신경망 모델 논문을 벽에 걸었을 것입니다. 이 논문은 내가 상상한 어떤 것이나 내가 우연히 택한 시작점이 아니라, 실제 세계의 문제를 몇 가지 제약 하에서, 그 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함으로써 풀려는 시도입니다. 만약 이 제안이 참이라면 – 아직은 논란 중이지만 – 이 결과는 내 돌고래 그림보다 훨씬 더 오래 남을 것입니다. 위대한 예술은 또다른 문제이며, 위대한 예술에는 평범함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림은 창조적이라고 말하지만 수학을 위대한 예술작품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버트란드 러셀은 1913년 뉴스테이츠맨에 쓴 글에서 사회가 과학을 경시하는 이유를 “과학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을 가르치는 이의 문제이다. 과학을 가르치는 이가 과학의 모든 가능성들을 깨닫고 있다면, 나는 과학이 문학 못지않게 고도의 지적 탁월함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는 수학의 경우 더욱 잘 들어맞는 말입니다. 그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뉴튼의 작업에 대한 수학의 오마쥬였던 “프린키피아 매쓰매티카(Principia Mathematica)”의 내용 중 논리적 기반에 대한 기념비적 분석에 기여했습니다. 이는 러셀로 하여금 수학의 아름다움에 대한 그 유명한 찬사를 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수학은 제대로 관찰한다면 그 안에 진실이 들어있을 뿐 아니라 최상의 아름다움, 곧 우리의 약한 본성에 호소하는 것도 아니면서, 미술이나 음악과 같은 화려한 장식도 없는,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순수한, 조각과 같은 차갑고도 엄숙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엄격한 완벽함을 가질 수 있다.” 나는 그가 자신의 경험을 조금 과장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앞서 수학은 관객을 위한 스포츠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말을 조금 수정해야 합니다. 컴퓨터 그래픽의 발전은 수학적 아름다움의 일면을 누구나 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휘황찬란한 색깔의 현란한 구조를 가진 베누아 만델브로이의 프랙탈은 지구상 어느 벽에서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의 아이디어는 처음에는 몇몇 수학자들에 의해 그저 뻔한 속임수라는 말을 들었지만 결국 응용 과학과 수학의 여러 분야에서 가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며, 다른 이들의 비난이 오히려 천박한 것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내 집 거실의 풍경화 옆에는 나의 동료 마이클 필드와 파티 골루비츠키가 혼돈 이론에 기여한 내용인 두 가지 우아한 대칭 프랙탈 끌개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나는 그들의 연구를 벽에 걸었습니다. 그 연구의 논리적 아름다움은 더욱 심오하며 러셀이 말한 엄격함에 필적하지만, 그저 피상적인 관찰로도 또한 주목할만한 혼돈과 질서의 향연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그림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숨은 수학적 구조의 실마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비록 사람들은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는 수학의 황금기를 살고 있습니다. 새로운 발견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고, 고대의 문제들이 해결되고 있습니다. 컴퓨터의 도움도 있지만, 주된 작업은 엘큘 포와로가 말했던 “작은 회색 세포”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1960년대 수학계에서 유행한 추상화는 무의미한 자기만족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결국 이를 추구하는 이들이 주장했던 말이 옳았음이 밝혀졌습니다. 곧, 추상화는 일반화와 생각의 명료화를 위한 필수적인 움직임이자 전체 수학분야에 영향을 미칠 새로운 도구라는 것입니다.

정수론에서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공을 효율적으로 쌓는 방법에 대한 케플러의 가설, 3차원 위상수학의 기본적 측면에 대한 푸앙카레의 가설 등의 역사적인 미해결문제가 최근 추상적 관점을 적용함으로써 해결되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불편해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추상화의 가치는 여러 차례 증명되었습니다. 1960년대, 물리학과에서는 수학이 정신을 망칠 수 있으니 수학과목을 수강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오늘날 영국의 생물공학 및 생물과학위원회는 모든 생물학 박사에게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수학 수업을 이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러셀은 자신의 NS 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과학에 헌신한 삶은 … 행복한 삶이며 그 행복은 이 문제많은 그러나 정열적인 행성의 모든 거주민들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그런 근원에서 오는 것이다.” 예술에 헌신한 삶과, 수학에 헌신한 삶 역시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인간 사고의 다양성은 칭송받아야 하며, 이 세 문화 중 더 뛰어나다고 주장되는 하나에 국한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인구는 증가하고 자원은 줄어들고 있으며 인간이 지구에 끼치는 영향은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모든 수를 다 써야 합니다. 종종 무시되어온 제 3의 문화인 수학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수학은 다른 학문들을 지지하는 뒷자리에서 내려와 중심적인 역할을 해야할 때입니다.

나는 뉴 스테이츠맨의 첫 사설에서 따온 말로 이 글을 끝내려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패를 테이블위에 놓았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입장인지를 독자들이 알 수 있도록 충분히 말했다…”

1부로

(뉴 스테이츠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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