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부고] 진화론에 생기를 부여한 스티븐 제이 굴드, 60세로 세상을 하직하다
2016년 7월 12일  |  By:   |  과학  |  No Comment

하버드 대학교의 진화 이론학자로 연구, 강의, 그리고 수많은 에세이를 통해 고생물학에 활기를 불어넣은 스티븐 제이 굴드가 어제 맨해튼에 있는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60살이었습니다.

그의 부인 론다 롤랜드 셰어러는 그가 암으로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20세기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진화생물학자 중 한 명이자 찰스 다윈 이후로 아마 가장 유명했던 굴드는 수많은 논쟁에 불씨를 지폈을 뿐 아니라, 과학자들이 진화의 패턴과 과정에 대해 가졌던 고정관념을 때로 다시 생각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나일스 엘드리지와 같이 만든 그의 가장 유명한 이론은 화석 기록을 볼 때, 진화적 변화는 서서히 일어나는 점진적 과정이라기보다는 불연속적인 과정에 가깝다는 이론입니다.

단속 평형설로 알려진 이 가설은 굴드가 진화론의 주류에서 한때 버려졌던 고생물학적 관점을 회복하려는 노력의 일부였습니다.

굴드는 현대 진화생물학자 중 전례 없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심슨(The Simpsons)” 시리즈에 등장하기도 했으며 맨해튼 소호 지구의 창고를 개조한 작업은 아키텍처럴 다이제스트 잡지에 인기 기사로 실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명석함과 고집 두 방면으로 모두 유명했고, 이 때문에 찬양과 질투의 대상이었습니다. 동료로부터도 존경과 욕설을 모두 들었습니다.

학계 바깥에서 굴드는 그의 글을 잘 아는 모든 이들로부터 거의 보편적인 숭배를 받았습니다. 그는 내추럴 히스토리 매거진에, 박식한 하버드의 교수이자 야구를 좋아하는 일반인의 두 가지 시선을 모두 담아 칼럼을 썼습니다. 에세이스트의 칼 립켄 주니어라고 불릴 만한 그는 1974년부터 2001년까지 300여 회 동안 빠지지 않고 자기 생각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에 실린 칼럼 중 상당수는 베스트셀러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Bully for Brontosaurus)“에 실렸습니다.

굴드는 그의 또 다른 인기 저서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Wonderful Life)”에서 버지스 셰일(Burgess Shale)에서 발견된 화석기록으로 남은 초기 생명의 진화를 이야기했고, “인간에 대한 오해(The Mismeasure of Man)” 에서는 인종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이론들을 의사 과학이론에 불과하다며 일축했습니다.

굴드는 1941년 9월 10일, 뉴욕 퀸즈에서 법원 서기였던 아버지 레오나드 굴드와 예술가이자 기업가였던 어머니 엘레노어 굴드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굴드는 고생물학에서 첫 경력을 다섯 살 때 아버지와 미국 자연사 박물관을 방문하며 시작합니다.

“나는 티라노사우르스의 골격을 처음 보고 놀랐을 때부터, 크게는 과학자를, 구체적으로는 고생물학자를 꿈꿨습니다.”라고 언젠가 그는 썼습니다. 그는 P.S. 26 초등학교와 자메이카 고등학교에 다녔으며 성장 과정 내내 화석과 뉴욕 양키스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오하이오의 안티오크 칼리지로 진학했고, 1963년 지질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67년, 그는 콜럼비아 대학에서 고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하버드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나머지 경력을 그곳에서 마쳤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금은 미국 자연사 박물관의 고생물학자로 있는 엘드리지를 만난 건 대학원생 시절로, 당시 동료 대학원생이었던 두 사람은 아직도 계속되는 논란으로 유명한 그 이론의 아이디어를 대학원생 시설 처음 발견했습니다.

화석 기록을 연구했던 그들은 자신이 배웠던 것처럼 연속적이고 점진적인 변화를 화석으로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생물들이 장기간 거의 변하지 않다가 갑자기 (갑자기란 지질학적 시간 단위에서의 표현입니다) 새로운 화석 형태가 등장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진화 생물학자들은 이런 어려움을 그 유명한 화석 기록의 불완전성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1972년 두 사람은 새로운 생물이 갑작스럽게 등장하며 변화 단계는 보이지 않는 것이 (화석 기록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 진화 과정도 그러했다는 단속 평형 이론을 제안했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매우 긴 시간 동안, 때로는 수백만 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종은 거의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간헐적으로 새로운 종이 발생해, 지리학적 시간 단위에서 급격한 진화가 일어나며 (여전히 인간의 시간 단위로 보면 무진장 긴 시간입니다) 이 때문에 화석 기록에는 새로운 형태가 갑자기 등장한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는 이론의 이름처럼, 안정된 평형 이후 갑자기 급격한 변화의 단속을 만들어냅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과학자들은 여전히 어떻게 화석 기록이 단속적 패턴을 보이며 어떻게 그런 패턴이 가능한지를 두고 논쟁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단속 평형 이론을 종종 지질학적 시간 단위에서 큰 규모의 진화적 변화를 연구하는 대진화 분야가 꽃피도록 만든 촉진제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1977년 굴드는 “개체 발생과 계통발생(Ontogeny and Phylogeny)”을 출판해 오랫동안 무시되어왔던 생물의 발달 – 곧, 어떻게 수정란의 계획으로부터 성체가 만들어지는지 – 과 그들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 사이의 관계에 생물학자들의 관심을 집중시켰습니다.

마운트 홀요크 칼리지의 진화 생물학자 스탄 라쿠틴은 이렇게 썼습니다.

“굴드는 생물학자들에게 그들이 연구하던 생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을 준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 책을 진화와 발달에 관한 연구, 또는 이보-디보라 불리는 새로운 분야에 영감을 불러일으킨 책으로 인정합니다.

굴드와 역시 하버드의 교수였던 리차드 르원틴은 곧 어떻게 생물체가 만들어지는지, 혹은 생물체의 구조의 중요성에 관한, 스팬드럴로 알려진 건축물의 한 특성으로 유명해진 논문을 출판합니다. 스팬드럴은 건물 내부의 아치 사이의 공간으로 아치를 가진 건물에는 반드시 존재합니다. 그들은 이처럼, 생물이 가진 어떤 특성은 그저 그 생물이 발달한, 또는 만들어진 방식의 결과로 존재할 뿐임을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연구자들이 생물의 모든 특성이 어떤 적응적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2002년 3월, 하버드 대학 출판부는 굴드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인정한 “진화 이론의 구조(The Structure of Evolutionary Theory)”를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그의 수십 년간의 노력이 담긴 책으로, 다윈의 기본 아디이어와 그 자신의 대진화 이론에 대한 주요한 기여를 자신의 시야로 통합한 책입니다.

“대단한 작품입니다,” 옥스포드 대학의 진화생물학자 마크 리들리는 이렇게 썼습니다. 비록 “거의 병적으로 장황하게” 1,433쪽에 달하지만, 리들리는 이어 “진화 생물학에서 지난 25년간의 유력한 아이디어들과 주요한 저서들을 방대하게 정리한 작품”이라고 썼습니다.

굴드는 때로 직접적인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의 단속 평형설과 같은 이론이 너무나 유연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검증이 불가능한, 확정할 수 없는 이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굴드가 고생물학을 진화론의 주요 의제로 올려놓은 사람으로 공인받은 이후, 영국 서섹스 대학의 진화생물학자 존 메이나드 스미스는 다른 진화 생물학자들이 “때로 그를, 너무나 혼란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있어 귀찮게 할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보기도 했다.”라고 썼습니다. 때로 이런 비판은 개인적이거나 지적인 수준의 비난으로 바뀌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단속 평형설은 “바보의 진화론”으로 불려왔습니다.

종 내의 작은 규모의 진화를 연구하는 이들, 곧 소진화론자들은 굴드의 큰 규모의 진화, 곧 대진화에는 대진화만의 독특한 특징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반대합니다. 그 대신 그들은 대진화를 그저 소진화가 장시간 축적되어 이루어지는 것으로 봅니다. 굴드는 또한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기 위해 특정한 방법을 사용하는 사회생물학자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그들 중에도 굴드의 생각에 반대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다른 이들은 그가 현대 다윈주의 프레임의 일부에 도전하는 이론을 옹호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창조론자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그들을 선동했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굴드는 교실에서 진화론을 몰아내려는 시도를 공식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사라져가던, 과학적 에세이를 예술의 형태로 쓰는 문화를 살린 이로 인정받는 재치있는 작가인 굴드는 종종 무관한 생각들이나 물건들을 함께 엮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떤 에세이에서 아브라함 링컨과 찰스 다윈이 같은 날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며 글을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언제나 희생자의 편에 섰던 그는 (뉴욕 양키스의 팬이었던 사실을 제외하면) 잊힌, 혹은 명성이 무너진 이론이나 과학자를 선호했습니다.

굴드는 또한 하버드 대학교 내에 진화론을 인기 있는 생각으로 만들었고, 때로 그의 강의실은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차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험이 주로 도서관에서 이루어졌던 것과 달리 그의 동료들은 굴드가 바하마에서 세리온 육지 달팽이를 연구했으며, 그가 현장에서도 매우 인상적인 이였다고 말했습니다.

굴드는 대학원 시절 세리온 달팽이와 그 화석을 수집하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조지아 대학에서 세리온을 연구하는 샐리 워커는 언젠가 “그는 길의 왼편으로 운전할 줄 알아요.” (바하마에서는 도로의 왼편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다 갑자기 문을 박차고 나가 우리가 보지도 못한 세리온 달팽이를 찾지요.”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 언어를 말하며 클래식 음악과 천문학, 그리고 셀 수 없이 다양한 취향을 가진 학생이 길버트와 설리번의 노래를 즐겼다는 사실을 그녀는 기억했습니다.

굴드의 유족으로는 아내와 어머니,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두 아들인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에 사는 제시 굴드, 보스턴에 사는 에단 굴드, 그리고 의붓아들인 플로리다 게인즈빌의 제이드 알렌, 의붓딸인 맨해튼의 런던 알렌이 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아내는 케임브리지에 사는 데보라 리이며 그들은 이혼했습니다.

굴드는 1982년 일찍이 암과 싸운 적이 있습니다. 그가 복부 중피종 진단을 받았을 때 그는 걸을 수 있게 되자 바로 하버드 의대 도서관으로 자신의 몸을 끌고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중간값이 메시지는 아니다”는 유명한 에세이에서 중피종 진단을 받은 이들의 생존 기간의 중간값은 겨우 8개월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그의 통계학 지식을 이용해 사망 선고나 다름없던 그 진단으로부터 나머지 절반의 사람들은 8개월보다 더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아마 더 긴 시간을 살았으리라는 희망적인 현실로 바꾸어 스스로 암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을 부여했습니다.

“내 운명이 다했을 때, 나는 마지막을 조용히 나의 방식으로 대하고 싶습니다.”라고 그는 썼습니다. 그러나 또한 “죽음은 최후의 적이며 … 나는 꺼져가는 불빛 앞에서 힘차게 분노하는 이들이 비난받아야 할 어떠한 이유도 찾지 못합니다.”라고 썼습니다. 그는 실험적인 치료법으로 살아남았으나, 그가 사랑하던 책들로 가득한 자신의 서재에 있는 침대에서 중피종과는 무관한 암으로 사망했습니다.

굴드는 맥아더(MacArthur) “지니어스” 상금을 그들이 수여를 시작한 첫해 받은 것을 비롯해 셀 수 없이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미국과학진흥협회(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회장을 역임했으며, 국립과학원(National Academy of Science)의 회원이었고, 전미도서상(National Book Award)과 전미비평가협회상(National Book Critics Circle Award)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버드 알렉산더 아가씨즈 동물학 교수였고, 뉴욕대학교의 애스터 방문연구 생물학 교수였습니다.

새로운 혹은 잊힌 아이디어들을 유창하게 또는 힘차게 내세우거나 자신이 본 것을 오인한 것으로 폐기하기도 했던 굴드는 자신의 활동 기간 불가능할 정도로 다양한 분야의 주제를 밝히려 했습니다.

그는 한때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고생물학 단체에서 농담으로 이야기되는 표어를 사랑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혹은 비유적으로, 망치는 우리 일의 가장 중요한 도구라는 것이다) : Frango ut patefaciam — 나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부수었다.”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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