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득 테크 산업 종사자들이 사회주의자 샌더스를 지지하는 이유
2016년 4월 21일  |  By:   |  세계, 정치  |  No Comment

이번 대선 시즌은 미국 좌파들에게 축제같은 기간입니다. 사회주의자가 백악관을 이토록 가까이에서 넘본 적은 없었으니까요. 버니 샌더스가 실제로 민주당 후보가 되지는 못할 수도 있지만, 그가 경선 과정에서 일으킨 돌풍은 좌파도 미국 정계의 주류에 진입할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샌더스의 지지 세력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밀레니얼 세대라 불리는 젊은이들, 저소득층, 그리고 지지 정당이 없는 유권자들이죠. 하지만 의외의 사람들이 샌더스 지지층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바로 고소득 테크 산업 종사자들입니다.

연방선거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샌더스 캠프의 기부자들이 가장 많이 속해있는 상위 5개 기업 중 4곳이 테크 기업입니다. 구글이 1위로, 구글 직원들은 캠프에 총 20만달러 정도를 기부했죠.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 아마존은 3, 4, 5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반면 클린턴의 경우, 상위 5개 기업 가운데 테크 기업은 없고 20위 안에 하나가 들어있을 뿐입니다. 샌더스의 기부자들 가운데는 교육과 테크 분야 종사자가, 클린턴의 기부자들 가운데는 법조계 종사자와 퇴직자가 많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특히 2015년 말 이후, 샌더스에게 기부하는 테크 종사자들의 수는 증가 추세에 있습니다. 클린턴 캠프 쪽은 변화가 별로 없는 것으로 볼 때, 이들은 정치 기부금 자체를 처음 내는 사람들인 것으로 분석됩니다.

미국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직장인들이 왜 사회주의자를 지지하는 것일까요? 이번 대선에서 갑자기 생겨난 예외적 현상은 아닙니다. 미국에서 샌더스 다음으로 유명한 사회주의자 정치인인 크샤마 사완트(Kshama Sawant) 시애틀 시의원 역시 아마존이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직원들로부터 큰 기부금을 받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테크 기업 종사자들이 규제나 부의 재분배보다는 자유 시장을 중시하는 정치 성향을 갖고 있을 거라는 통념과 달리, 좌파 정치인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는 이야깁니다.

이 현상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설명이 따릅니다. 첫째는 이들이 죄책감 때문에 좌파 정치인을 지지한다는 것이죠. 샌프란시스코 같은 도시에서 집값 폭등을 일으킨 주범으로 사회적 비난을 받기도 하고, 일반 직장인들보다 훨씬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 소득 불균형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전혀 다른 주장도 있습니다. 이들도 여느 샌더스 지지자와 마찬가지로 샌더스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생각해 표를 준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게 무슨 말일까요? 이들은 높은 연봉을 받지만, 그 수준의 연봉도 자신들이 사는 지역의 무시무시한 집값을 부담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살면서 연봉 1억을 받아도, 세금을 떼고 남는 돈의 절반 이상을 방 한 개짜리 아파트 월세로 내야 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월세를 내고 남는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도 집을 사려면 40년이 걸린다는 계산도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가 좀 극단적인 동네이긴 해도, 시애틀이나 산호세, 보스턴처럼 테크 산업 종사자들이 모여 사는 곳의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즉, 테크 산업 종사자도 큰 틀에서 보면 결국은 샌더스가 이야기하는 경제적 부조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월급쟁이라는 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뚜렷한 경계선은 월급을 많이 받는 사람과 적게 받는 사람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을 소유한 자와 소유하지 못한 자 사이에 있다는 것이죠. 미국에서는 소득 불평등도 계속해서 심화되고 있지만, 자산 불평등은 훨씬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미국 상위 10% 부자들이 가져가는 소득은 전체의 4분의 1 정도지만, 보유하고 있는 자산(부동산, 주식, 채권 등)은 전체의 76%에 달하니까요.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높은 연봉을 받는 사람들은 무리없이 중산층에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학자금 대출을 받아가며 힘겹게 학업을 마치고 좋은 직장을 얻어도 여전히 경제적으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억대 연봉을 받는 테크 산업 종사자들 중에서도 자신이 샌더스식 재분배의 수혜자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일하면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는데, 집을 사고 자식들 대학 등록금을 내고 노후를 준비하기가 막막하다면 이 체제 자체가 잘못된게 아닐까 의심을 할 수 밖에 없죠.

물론 테크 산업 종사자들은 대부분의 월급쟁이보다 형편이 낫습니다. 하지만 고도로 금융화된 미국의 현대 자본주의가 비교적 형편이 좋은 월급쟁이들마저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어쩌면 이런 위기는 좋은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샌더스를 지지하는 고소득 테크 산업 종사자들은 대선 이후 샌더스 돌풍을 다음 단계로 이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당장 샌프란시스코에서 집 한 채를 살 수는 없어도, 좌파 정치인들에게 기부금을 낼 정도의 여유는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가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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