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버킷 리스트
2015년 12월 14일  |  By:   |  문화  |  No Comment

한 달에 한 번꼴로 자신 내부의 빛으로 환히 빛나는 사람과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삶의 어느 순간에든 나타나곤 하죠. 이들은 정말 선합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죠. 이들과 있으면 당신은 재미있고 소중한 사람이 됩니다. 이들이 다른 사람을 돌볼 때면 웃음소리는 노랫소리 같고, 감사한 마음이 공간을 가득 채웁니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지도 않죠. 아니, 이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난 날은 하루가 온통 빛나고 가치 있는 날이 되곤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편으로 씁쓸해지기도 하죠. 일에서는 제법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인간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한 저 자신이 새삼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 그런 자비로운 영혼도, 그런 깊이 있는 인간적 품위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에 씁쓸해지는 겁니다.

몇 년 전 저는 제가 그렇게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내 영혼을 구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노력해야겠다는 것도요. 이제부터 영혼의 순례를 시작해 그런 선함을 발산하는 사람이 될 참이었습니다. 내 인생의 균형을 바로잡겠다고 다짐했죠.

세상에는 이력서 덕목과 추도사 덕목, 두 가지 종류의 덕목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력서 덕목은 당신이 일자리를 구할 때 당신을 빛나게 해주는 업무 능력이죠. 추도사 덕목은 당신의 장례식에서 사람들이 거론할 것들입니다. 친절하고, 용감하고, 정직하며 믿음직한 친구였다는 식으로요. 당신은 깊은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요?

우리 모두 추도사 덕목이 이력서 덕목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와 교육 제도는 일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기술과 전략을 가르치기 바빠 영혼을 빛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할 틈을 잘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개 인품을 키우는 방법보다 일에서 성공하는 방법을 더 잘 압니다.

그러나 당신이 외적인 성공만 추구하다 보면 가장 깊은 곳의 당신이 방치되고 맙니다. 도덕의 언어는 잊게 되죠. 스스로 만족하면서 보통 수준에서 타협해버리기 쉽습니다. ‘이 정도면 되지’라고 생각하죠. 눈에 띄게 잘못하지 않고, 사람들이 딱히 나를 싫어하지 않는 이상 그 정도 선에서 적당히 하고 마는 거죠. 그러나 그렇게 살다 보면 당신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인생의 의미나 기쁨을 잊고 지루한 삶을 살게 될 겁니다. 당신이 원하던 당신과 실제의 당신, 가끔 만나게 되는 그 빛나는 사람들과 당신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기만 할 뿐입니다.

그래서 몇 년 전 저는 그렇게 빛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인품을 갖추게 되었는지 밝혀보기로 마음먹었죠. 실제보다 똑똑한 척하는 식자층에 불과한 제가 그런 인품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적어도 그런 사람이 되려면 어떤 길을 밟아야 하는지는 정말로 알고 싶었습니다.

연구 끝에 저는 이 대단한 사람들이 타고난 게 아니라 꾸준한 노력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사람들은 도덕적인 영혼의 성취를 천천히 달성하면서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내부의 진짜 인격을 갖추었습니다.

이 단계를 그럴듯하게 포장해 ‘내 영혼의 버킷리스트’라고 부르려 합니다.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이루었던 경험들을 저도 하나씩 이루어보려는 겁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여기에 소개합니다.

 

겸손해지기
우리는 ‘대단한 나’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실력주의 시대가 되면서 자기 홍보가 더욱 중요해졌죠. 소셜미디어는 당신 인생의 최고봉을 부풀려 자랑하라고 부추깁니다. 당신 부모님과 선생님은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늘 이야기하곤 했지요.
그러나 제가 존경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게 이기적인 마음이든 인정받으려는 욕구든 소심함이나 냉담하고 무정한 마음이든지 간에요. 그들은 이러한 약점이 어떻게 스스로 부끄러운 행동을 자초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중심에 놓는 대신 다른 사람을 중심에 놓고 자신을 위치를 파악하면서 진심으로 겸손해질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과 싸움에서 승리
외부적인 성공은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겨서 얻습니다. 그러나 인품은 자기 자신의 약점을 마주할 때 키워지는 겁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화를 조절하지 못하는 본인의 약점을 일찍이 깨달았다고 합니다. 다른 이를 리드하려면 낙관주의와 자신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쾌활하고 사교적인 척했지만, 속으로 화를 다스리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화가 날 때면 싫어하는 사람의 이름을 종이에 적은 후 마구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곤 했습니다. 본인의 원죄를 마주하고 다스리려 평생을 노력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아이젠하워는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이 드러날 법한 상황에서도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의존에서 벗어나기
졸업할 때 흔히 주는 선물 중에 닥터 수스의 <오, 네가 갈 그곳들!(oh, the Places You’ll go!)>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삶이 자율적인 여행이라고 묘사합니다. 우리는 무언가 달성하려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또 다른 모험을 하죠. 이 개인주의적인 관점은 우리가 강한 의지로 무장한 강철과 같은 사람인 것처럼 묘사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길에서 누구도 홀로 이 모든 것을 달성하지는 못합니다. 개인의 의지, 동기, 감정은 자기 자신을 뛰어넘을 만큼 강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항상 주위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주위의 도움을 인지한 사람은 인생을 꾸준히 다른 약속과 책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으로 봅니다. 인품은 당신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 나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도 극복할 만큼 다른 사람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나요? 지성의 세계에서, 인품이 훌륭한 사람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자신의 철학을 구축한 사람입니다. 감성의 세계에서는 끝없는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죠. 행동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생이 끝날 때까지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어려운 일도 해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힘을 주는 사랑
도로시 데이가 젊을 때 그녀 인생은 엉망진창이었습니다. 늘 술에 취해 흥청망청 살았고, 자살을 시도했으며,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면서 인생의 갈피를 도무지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딸이 태어나면서 모든 게 바뀌었습니다. “가장 위대한 책을 쓰거나, 가장 훌륭한 음악을 작곡하거나,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거나, 가장 아름다운 조각작품을 창조해내더라도 내 품에 안긴 아이를 보면서 내가 이보다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내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사랑은 자신을 바꾸어 놓습니다. 진짜 당신은 다른 사람 안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죠.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는 데서 진정한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딸을 향한 그녀의 사랑은 주변에까지 좋은 기운을 미쳤습니다. “어떤 인간 존재도 아이를 낳은 후 제게 밀려온 태풍 같은 사랑과 기쁨을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사랑하고 섬기고 싶어졌죠.”

그녀는 종횡무진 사랑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급진적인 신문 발행을 시작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집을 열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빈곤한 사람들을 위한 공동체를 꾸려갔습니다. 그저 착한 일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 되려고 부단히 노력하게 된 겁니다. 사랑은 항상 자기중심적인 우리를 바꾸어놓기도 합니다.

 

소명 속의 소명
우리는 돈, 사회적 위치, 안정을 바라며 직업을 고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직업을 소명으로 바꾸어나갑니다. 이러한 경험은 나 자신의 욕심을 최대한 억누르죠. 더 좋은 삶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 곧 자신의 일이 되는 겁니다.

프란세스 퍼킨스(Frances Perkins)는 20세기 초 진보 운동에 뛰어든 활동가였습니다. 그녀는 원래 예의 바르고 점잔 빼는 좀 따분한 상류층의 보통 아가씨였죠. 그러나 어느 날 우연히 트라이앵글 의류공장에 불이 났을 때 노동자 수십 명이 불에 타 죽느니 몸을 던져 죽는 걸 목격한 이후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이 경험은 도덕적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그녀의 삶에 소명이 생겼죠.
그 이후로 인생을 노동자 권익에 바쳤습니다. 누구와 일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누구와도 타협할 준비가 되어있었으며, 한번 결정한 일은 망설이지 않고 밀어붙였습니다. 운동에 더 효과적으로 기여하고자 외모까지 바꾸었습니다. 그녀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내각에서 미국 역사상 첫 번째 여성 위원이 되었고, 20세기 시민운동의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사회적 의무를 벗어던지기
인생에는 자신의 사회적 명성이나 위치, 학연, 지연 등에서 완전히 벗어날 기회가 찾아오곤 합니다. 실리에 맞는 행동을 하지 않고 두려움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도 있지요.
소설가 조지 엘리엇(진짜 이름은 메리 앤 에반스였습니다)은 감정적으로 불안하고 만나는 남자마다 사랑에 빠져 쫓아다니다 거절당하는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그러다 30대 중반에 조지 로이스라는 사람을 만나죠. 그는 아내와 별거 중이었지만 법적으로는 결혼한 남자였습니다. 계속 그를 만나면 간통을 저지른 죄인으로 낙인찍힐 상황이었죠. 친구를 모두 잃고, 가족과 절연할 상황에서 그녀는 일주일을 고민한 끝에 계속 그를 만났습니다. “가볍고 쉽게 끊어질 사회적 끈은 내가 원하는 것도 아니고 내 삶을 바칠 대상은 더욱 아니다. 그런 사회적 고리에 행복한 여성은 나같이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현명한 판단을 내렸습니다. 조금씩 안정을 찾았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내면의 인품을 길렀죠. 그녀와 로이스의 사랑은 나이 들고, 상처받고, 책임감에 얽매인 사람들이 그 후에 찾는 안정적이고 헌신적인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로이스의 도움을 받으며 그녀는 동시대 최고의 소설가 반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불안한 성격도 함께 노력한 끝에 조금씩 안정되어갔습니다.

졸업식 연사들은 젊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열정을 쫓아가고 진실한 삶을 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삶은 자신에서 시작해 자신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빛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만 묻지 않습니다. 삶이 내게 원하는 게 뭐지? 내 능력을 세상이 필요한 데 쓰고 있나?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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