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대중문화의 성공은 대영제국의 몰락 덕분?
2015년 11월 11일  |  By:   |  문화, 세계  |  No Comment

올가을, 스파이 액션물의 고전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24째 작품 ‘스펙터’로 다시 관객을 찾습니다. 제임스 본드의 세상에는 여전히 술과 섹스, 폭발물이 넘쳐나고, 영국은 초강대국이며, 정치적 올바름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시리즈의 전작들이 그랬듯, 이 영화는 전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할 것입니다. 영화뿐이 아닙니다. 대영제국의 태양은 져버린 지 오래지만, 오늘날 영국의 문화 지배력은 여전합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두 도시 이야기)과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소설(반지의 제왕)은 모두 영국산입니다. 영국 뮤지션들은 글로벌 차트를 점령하고 있고, 드라마 <다운튼 애비>는 지구 반대편 중국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죠.

최근 역사학자인 도미닉 샌드브룩(Dominc Sandbrook)은 이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영국 문화 열풍의 뿌리로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인 영어의 역할에서부터, 광고를 받지 않아 영국 광고 업계를 오히려 단련시켰다는 공영방송 BBC의 역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인들을 꼽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샌드브룩은 빅토리아 시대가 현대 영국 대중문화의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합니다. 영국에서는 산업화가 일찍 이루어진 덕에 도시화가 빨랐고 국민의 식자율도 높아졌습니다. 잡지, 공연장 등의 문화가 빨리 꽃을 피웠죠. 제국의 역사 덕분에 시골의 저택, 계급 제도, 기숙학교, 모험가 등 소설의 소재와 배경이 될 만한 요소도 다양하게 갖추고 있습니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JK 롤링, 사이먼 코웰은 대영제국이 깔아놓은 기찻길 위에서 달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죠.

영국의 역사와 현대 대중문화 강국으로서의 영국을 연결 짓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앞서 소개한 대로 산업화와 제국주의를 거름 삼아 오늘날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문화 콘텐츠들이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개척정신을 강조하는 미국이나, 20세기 초반 폭력을 수반한 격변을 겪은 다른 유럽 국가 및 동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영국은 과거와 지속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대영제국의 쇠퇴가 영국을 대중문화 강국으로 만들었다는 설명도 가능합니다. 식민지 시장이 갑자기 사라지고 신흥 강국들과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게 되면서, 영국은 급작스럽게 후기 산업사회로 접어들게 됩니다. 공장을 중심으로 번영했던 도시들이 쇠퇴하면서 실업률은 치솟고 우울한 기운이 나라 전체에 퍼져나갔습니다. 하지만 이런 배경은 영화 <빌리 엘리엇>, <풀 몬티>, 밴드 스미스와 오아시스를 낳았습니다. 독일의 바덴뷔르템베르크에서 노엘 갤러거 같은 독보적인 뮤지션이 탄생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엄청나게 거만하고도 반항적이면서도 시장에서 잘 팔리는 그의 캐릭터는 영국 맨체스터의 분위기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또한, 제국의 종말이 다가오면서, 영국의 문화예술인들은 세계 시장을 겨냥한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제임스 본드, 비틀즈, 롤링스톤즈 등 2차대전 이후 히트한 영국의 문화 상품은 대부분 세계 시장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강한 지역색을 띠거나 영국 관객만을 겨냥한 콘텐츠는 인기를 끌지 못했죠. 아델이나 원디렉션도 외부의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해외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예로, 이와 같은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영국은 EU와의 관계, 핵무기, 이민, 중국과의 관계 등 복잡한 과제를 앞에 두고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마치 영국이 강한 유럽 국가 또는 미국의 51번째 주 가운데 양자택일해야 하는 듯한 분위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영국이 대중문화 부문의 경험을 바탕으로 강한 힘과 겸양, 보호주의와 국제주의, 자부심과 호기심을 겸비한 하이브리드 파워로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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