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스 크라우스 칼럼] 법 위에 군림하려는 종교는 시민사회의 적 (1)
2015년 9월 11일  |  By:   |  칼럼  |  No Comment

옮긴이: 우주를 연구하는 과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애리조나 주립대학의 로렌스 크라우스(Lawrence Krauss) 교수가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반한다는 이유로 혼인 신고를 하려던 동성 커플에게 결혼 증명서 발급을 거부한 켄터키 주의 공무원 킴 데이비스(Kim Davis)와 관련한 일련의 사태를 보고 뉴요커에 쓴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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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주를 연구하는 물리학자입니다. 과학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주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러 곳에 글을 쓰고 강연을 다니며 과학을 널리 알리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과학과 종교는 종종 맞부딪힙니다. 과학자인 저는 때로 종교적인 믿음이 과학적으로 얼마나 근거 없는 어리석은 것인지 밝히며 종교를 거침없이 조롱하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저는 “호전적인 무신론자(militant atheist)”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저의 과학자 동료들 중에도 표현의 수위를 조금 낮춰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덮어놓고 제 이야기에 귀를 닫는 사태를 피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조언을 하는 이도 있습니다. 결국 다 같이 더 공정하고 살기 좋은 세상 만들자는 건데, 다른 사람의 종교적 신념도 충분히 존중하고 불필요한 마찰은 피해야 같이 머리를 맞대고 필요한 경우 지혜를 모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다 이번 주 킴 데이비스(Kim Davis)와 관련된 일련의 사태를 지켜봤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있겠지만, 데이비스는 켄터키 주의 행정직 공무원으로 혼인증명서를 발급해주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데이비스는 최근 미국 모든 주에서 동성간의 결혼을 인정한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어겼습니다. 혼인 신고를 하려는 동성 커플에게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신의 뜻을 어길 수 없다며 증명서 발급을 거부한 겁니다. 그리고 법원을 모독한 죄로 수감됐다가 며칠 뒤 풀려났습니다. 데이비스가 석방되던 순간 수많은 지지자들이 모여 그녀의 이름과 미국을 연호했습니다. 그들은 데이비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에 따라 종교적 신념을 지키려했을 뿐이라며 이를 위협하는 압제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켄터키 주 상원의원이자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을 치르고 있는 랜드 폴(Rand Paul)도 있었습니다. 폴 의원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한 개인이 종교적 신념에 따라 한 행동을 처벌하는 건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먼저 근본적인 질문부터 짚어봅시다. 종교적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법을 어겨야만 할 때 우리는 이를 어디까지 용인해야 할까요? 아주 극단적인 사례부터 들어보죠.여기 이슬람 근본주의자이자 지하드에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신을 믿지 않는 자, 이슬람교를 배신한 자는 신의 이름으로 참수해도 좋다고 꾸란을 해석했습니다. 그가 저지르는 살인은 용인될 수 있습니까? 아마 랜드 폴 의원도 단칼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 겁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훨씬 덜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보죠. 여기 주 정부 행정직 공무원이 있습니다.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인 그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미혼 여성과 남성이 법정에 같이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얼굴, 머리에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에게는 결혼 증명서를 발급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 사람은 법을 어기고 있으며 직무를 유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행동은 종교적 신념에 따른 겁니다. 우리는 이를 용인해야 할까요? 이 사람과 킴 데이비스의 차이가 있다면 데이비스의 신념은 폴 의원의 동의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고, 가상의 무슬림 공무원의 신념은 폴 의원이 동조할 수 없는 믿음이라는 점일 겁니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하고 신성한 사실, 혹은 믿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별 의미가 없거나 또는 반대로 혐오의 대상일 수도 있습니다.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뜻하는 세속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 국가들의 법이 생각이나 신념이 아니라 행위를 규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든, 어떤 믿음을 갖든 그 자체로 불법이 될 수는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특정 범법 행위를 정당화시켜주는 어떠한 신념이나 사상도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데이비스에게는 신앙의 자유가 있습니다. 이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법은 한 사람의 사상과 신념을 구속하지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신념이 행동으로 나타나 행동이 법을 어겼을 때는 당연히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아니, 달라져야 하는데 최근 들어 이 원칙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습니다. 종교적 자유라는 이름 아래 시도된 끊임없는 물타기가 효과를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과 정부, 그리고 수천 명을 고용하고 있는 대기업까지 “법의 적용에서 우리는 예외”라고 외쳐 왔습니다. 이들이 목표로 삼는 법은 종교 관련 법안이 아닙니다. 임신 중절이나 동성 결혼, 건강보험 등 사회적인 문제와 관련된 법안, 특히 보수와 진보가 벌이는 치열한 논란의 한 가운데 있는 법안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어쨌든 이들에게 종교적인 신념은 법을 어기고도 정당성을 인정받거나, 최소한 남들이 정상은 참작해줘야 하는 대단한 무언가입니다.

정부의 기본적인 목표는 모든 시민에게 법을 동등하게, 공정하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신념도 당연히 이 대원칙을 훼손하는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세속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라면 당연히 그렇습니다. 법 위에 군림하는 종교는 세속주의 가치와 절대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킴 데이비스의 사건은 원칙대로라면 애초에 논란조차 되어서는 안 되는 사안이었습니다. 종교를 들먹이며 예외를 주장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미국 사회는 종교적 신념, 감성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종교적 자유를 외치는 이들이 시민사회의 자유를 억압하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종교적 자유(religious liberty)란 어떤 특정한 종교, 신념이라도 다른 신념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뜻일 겁니다. 특별 대우도, 차별 대우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죠. 법이 특정 종교를, 혹은 전반적인 신념을 억압하고 차별하기 위해 집행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법이 종교적인 신념에서 비롯된 행동에 특별히 관대해서도 안 됩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뭐든 해도 용인되는 게 종교적 자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성하다”는 단어는 사실 과학을 모독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과학에서는 어떠한 사상도, 종교도, 믿음도, 그 자체로 불변의 진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질문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섭리가 있다는 주장은 이 세상 모든 과학자들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모독입니다. 과학은 질문과 반론이 끝없이 꽃피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과학은 무신론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과학자로서 내가 하는 실험에는 어떤 신도, 천사도, 악마도 개입하지 않는다. 지금껏 내가 과학자로서 해온 모든 과학 실험에서 이 가정은 한 번도 틀리지 않았다. 과학자의 삶은 무신론적이다.”

1934년 생물학자 할데인(J.B.S. Haldane)이 쓴 글입니다. 제게는 이 글이 무척 상식적인 선언으로 보이지만, 우리 주변에는 어떻게든 과학과 종교의 접점을 찾아보고 틀어진 관계를 개선해보려는 시도가 끝없이 일어납니다. 사실 과학과 종교는 좀처럼 어울릴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30년 넘게 과학자로 살아오면서, 학술적인 일을 논의하는 자리에 단 한 차례도 “신(God)”이란 단어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한 사회의 시민이라면 종교의 유무, 특정 종교의 신자 여부를 떠나 모두 똑같이 법을 지켜야 하는 것처럼, 신에 대한 믿음의 유무는 자연의 섭리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밝혀내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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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Yo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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