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기 사고가 날 때마다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이들의 위선
2015년 7월 27일  |  By:   |  세계, 칼럼  |  No Comment

“희생자를 위해 다같이 기도합시다.”

지난주 루이지애나 주 라파예트(Lafayette) 시의 극장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을 때 주지사 바비 진달(Bobby Jindal)이 한 말입니다. 진달 주지사는 사건 이후 카메라 앞에 설 때마다 늘 기도하자는 말을 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기도하자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나도 그가 할 말은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진달 주지사는 “그저 영화를 보고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러 나온 선량한 시민들을 향해 이렇게 총기를 난사한 극악무도한 범인의 범행 동기를 도저히 알아낼 길이 없어 안타깝다”고도 했습니다. 이 말은 뻔한 수사 같지만, 실은 근본적인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비껴가며, 심하게는 은폐하기 위한 말이기도 합니다. 범인이 초능력이라도 써서 살인을 저질렀나요? 살인 사건을 분석할 때 범행 도구는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하지만 진달 주지사는 총기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마치 그를 비롯한 정치인들이 총기 규제를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무던히도 애쓰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날까 우려하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목표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총기를 난사해 사람이 죽었는데, 사건을 수습하고 설명하는 정치인은 신이 이미 사건의 전말을 다 점지해두셨던 것처럼, 그리고 총이란 단어는 입밖에 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정해진 것처럼 기도하자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에서) 총기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 사회는 여성이 호르몬제를 선택적으로 복용할 수 있는 권리를 두고, 노조에 지급하는 주 정부의 보조금을 대폭 삭감하는 문제를 두고 치열한 정치적 논쟁을 벌였습니다. 9.11 테러가 일어났던 뉴욕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무슬림들이 커뮤니티 센터를 짓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엄청난 논란이 뒤따랐습니다. 그런데 총기 문제는 누구도 입밖에 내지 못합니다. 몇 가지 조건이 성립되면 폭발적으로 여론이 들끓기는 합니다. 얼마 전에 테네시 주 채타누가(Chattanooga)에서 일어났던 총기 난사 사건의 경우가 그랬는데, 이 사건은 마침 대중을 선동하기에 가장 적합한 이슬람교를 믿는 이들이 감히 우리 사회의 영웅인 군인들을 향해 총격을 가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전 세계 무슬림 테러리스트들을 모두 색출해 철저히 응징하자는 선동이 판을 쳤습니다. “무슬림 테러리스트” 중에 “테러리스트”는 곧 슬쩍 감춰지고 “무슬림”만 남아 증오가 무슬림 사회 전체로 너무 쉽게 번지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총기와 관련해 그나마 논쟁이 허용된 주제가 하나 있습니다. 총기 사고를 막기 위해 더 많은 이들이 총으로 무장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에 관한 논쟁은 이상하게도 허용이 됩니다. 학교에서 누군가 총기를 난사하는 끔찍한 일을 막기 위해 경호원은 물론 선생님도 총으로 무장시키자, 극장에서 이런 끔찍한 사고를 막기 위해 매표소 직원에게 총기 교육을 시키고 경호 업무를 같이 맡기자는 주장은 허용됩니다. 상호 확증 파괴를 뜻하는 “MAD(Mutual Assured Destruction)”라는 군사 용어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 “너가 나를 공격하면 수십, 수백 배의 피해를 입히겠다, 나만 다치진 않겠다, 같이 죽어도 상관 없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 힘의 균형을 뜻하는 용어입니다. 총기를 규제하고 줄이자는 논의는 금기시되어 있는 미국 사회에서 총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MAD 개념을 끌어들여 억지력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은 버젓이 논의됩니다.

지금 미국 사회는 평화적인 방법과 생의 의지로 죽음을 막자는 논의 자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죽음으로써 죽음을 막겠다는 발상의 끝은 모두에게 죽음의 그림자만 드리워진 절망일 뿐입니다. 절망의 순간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겠죠. 지금 우리의 모습은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다 포기한 채, 그저 신에게 기대어 기도만 하고 있는 모습이나 다름 없습니다. 찰스턴의 교회에서 아홉 명이 목숨을 잃었던 것처럼 신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어떡하죠? 다음 번엔 더 열심히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Guard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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