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EON] 은유 디자이너의 삶 (3/3)
2015년 6월 18일  |  By:   |  과학, 문화  |  No Comment

1부

2부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은 감정적 반응입니다. 나는 아이들이 불행한 아동기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프로젝트를 수행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해 불우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훌륭하게 자라나는 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버클리의 소아과 의사 톰 보이스가 썼던 민들레(dandelion)와 난초(orchid)를 이용한 은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은유를 이용해 두 종류의 아이들을 설명했습니다. 곧, 민들레처럼 환경에 상관없이 잘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난초처럼 환경에 매우 민감한 아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자들이 이 은유를 좋아했습니다. 과학 저술가 데이비드 돕스는 “민들레와 난초”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이 은유는 성공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이 이 은유를 제대로 받아들였을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민들레와 난초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단어에 대해 이런 결과를 얻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 두 식물의 비교가 아이들의 차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 것도 사실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난초를 민들레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긴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더 귀한것, 더 아름다운 것을 흔한 잡초보다 더 가치있게 여깁니다. 즉 일반적인 미국인들은 민들레를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면, 자신의 아이들은 소중하고 귀한 존재입니다. 만약 은유가 사람들로 하여금 적절한 표현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그 은유는 실패한 은유입니다. 우리는 결국 새로이 체중계의 은유로 긍정적 영향과 부정적 영향을 설명했고, 아이를 회복시키는 것은 그 아이 고유의 특성이라기보다 아이가 처한 환경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나는 이런 은유가 정말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느냐는 질문을 자주 듣습니다. 정답은 그렇다 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새로운 은유를 테스트하기위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솜씨(skills)란 무엇인지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들은 늘 그렇듯이 그저 우물거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솜씨란 밧줄과 같아서 여러가지 요소들이 엮여서 발휘된다고 말하며 그들에게 다른 질문을 던지자, 이들은 솜씨를 구성하는 요소들과, 이들이 어떻게 결합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우리가 준 새로운 생각에 스스로 빠진 듯 행동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일하는 방식에서 곧 은유가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은유 디자이너는 또한 어떤 아이디어가 좋은 것인지를 알아야합니다. 콜로라도 대학의 심리학자 월터 킨취는 강한 은유는 이미지와 함께, 여러 단어와 연관되기 쉬운 구체적인 용어로부터 만들어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은유는 설명하려는 것과 너무 가까워서도 안됩니다. 킨취는 ‘약간은 특별하면서, 기분 좋은 놀라움을 안겨줘야 한다. 그러나 너무 놀라워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나는 놀라움에 관한 킨취의 이 표현이 마음에 듭니다. 한편, 좋은 은유는 또한 문화적으로 존재하는 여러 함정들을 피해가면서 살아남을 수 있어야합니다. 일단 세상으로 퍼진 은유는 원래의 뜻을 바꾸는 편견을 만나기도 하고, 의미를 아예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민들레와 난초의 예에서는 꽃 사이의 서열이 원래 은유의 목적을 빼앗아 가버린 것입니다.

UCLA 의 뇌과학자 댄 시겔이 만든 은유도 같은 운명을 겪었습니다. 그는 실행기능(executive function)을 가진 뇌와 감정, 동기부여, 학습 등 다양한 기능을 가진 변연계(limbic system)에 대해 ‘위층 뇌(upstais brain)’와 ‘아래층 뇌(downstairs brain)’라고 불렀습니다. 나는 내 아이가 걸음걸이를 막 뗄 때부터, 행동을 제어하고 규칙을 정하고 사회적 상호작용을 주관하는 ’위층 뇌’를 사용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비유가 사랑, 흥분, 호기심 등의 감정을 ‘아래층’으로 묘사하며 덜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는 것을 보고 이 비유의 문제점을 깨달았습니다.

은유 디자이너는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와 문화의 자원들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곧 알게됩니다. 그리고 생각처럼 다용도로 쓰는 것도 어렵습니다. 디자이너가 가진 편견과 취향에 의해, 그리고 문화적 제한에 의해 모든 가능한 의미들을 다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은유 디자이너는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진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나도 답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는 적어도 사회를 이롭게할 은유를 만들고자 노력합니다. 나는 주로 사회적 기관들을 위해 은유를 만들어 왔습니다. 대화를 통해 전문가의 관점을 이해하려 노력했고, 지금까지 내가 한 일들에 대해 만족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의 이해를 돕는다는 점입니다. 은유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해력의 차이를 메꾸며, 적어도 더 쉽게 더 빨리 이해하도록 만듭니다. 나는 어떤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반드시 보아야 하는 것을 방해하지도 않습니다. 내 은유의 방에 있는 창문들은 현실을 다르게 바라보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물론 은유가 현실의 어떤 면을 과도하게 단순화 시킨다거나, 현실을 모호하게 만든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은행을 정말 돈을 넣어두는 단지로 생각해도 될까요? 아이들은 정말 꽃처럼 아름답고 약한 존재인가요? 이것은 매우 흔한 은유들이지만, 너무 여기에 빠져들게 되면 오히려 나쁜 결과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런 은유는 이미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편견을 더 강화시키는 은유입니다. 국가의 경제를 운영하는 것과 한 가정의 수입 지출을 따지는 것이 정말 비슷한 일일까요? 미국에서 가정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 단위이기때문에 ‘국가 예산은 곧 가정의 예산’이라는 말이 매우 넓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선동적인 보수파 정치인들이 이 말을 많이 쓰고 있지요.

은유를 만들다 보면 일상의 수많은 표현들이 특정한 효과를 노리고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효과에 저항하는 것은 마치 오레오 쿠키의 크림을 맛보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처럼 부질없는 짓입니다. 은유 디자이너에게 뜻밖의 은유를 발견하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얼마전 나는 설탕의 해악을 바나나가 익는 것에 비유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설탕을 많이 먹으면, 몸 속이 바나나처럼 갈색으로 변한다는 것이죠.

사람들이 이 비유를 많이 쓰게 될지는 모르겠군요. 적어도 나는 잊어버리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A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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