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은 도대체 왜 존재하는 것일까요
2015년 3월 24일  |  By:   |  문화  |  2 Comments

오늘날 지옥(hell)이라는 단어는 흔하게 등장합니다. 때로 데이트가 즐겁지 않았을 때 우리는 그 시간이 지옥같았다고 말하며, 욕설의 일부로도 흔히 사용됩니다. 이런 면에서 이 개념은 우리의 종교와 문화에 깊게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지옥에 대해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신앙을 가진 신학자들 중에도 지옥은 비도덕적이거나 또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으며, 이때문에 이들은 지옥이라는 개념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왜 우리는 이 개념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합니다.

시대적인 기원을 따져 보자면, 지옥이 항상 사후세계에서 어떤 위치를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우리의 발 밑에 존재하는 어둠의 땅을 말하는 저승(Sheol)이라는 개념이 종종 등장합니다. 이 곳은 죽은 이들이 가는 곳이며, 이는 죽은 이들이 땅 속에 묻히기 때문입니다. 때로 저승은 입을 벌려 사람을 삼키는 것으로 묘사되며 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지진 현상을 말합니다. 성경의 저승은 인간이 하느님(God)과 분리된 음침한 장소이지만 반드시 나쁜 사람들만을 위한 곳은 아닙니다.

유대교에 죽음 이후의 심판, 보상, 처벌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기원전 2세기 즈음입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은 식민지였고 그리스 제국 후손들의 억압을 받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높은 세율, 식민지 문화와 함께 지하세계에서 벌어지는 사후 심판이라는 개념을 이스라엘로 가져왔습니다. 당시 사후 세계를 말하는 여러 종교단체가 있었으나 유대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이 그리스인들이었습니다. 바위를 끝없이 언덕위로 올려야 하는 시지푸스나 영원한 갈증의 벌을 받는 탄탈루스, 그리고 매일매일 간을 뜯기는 프로메테우스는 사후 심판의 좋은 예일 것입니다. 현실에서 억눌리던 유대인들에게 지상에서의 불의가 죽음 뒤에 심판을 받게 된는다는 개념은 매우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그 심판에는 악인에 대한 처벌과 의인에 대한 보상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개념이 익숙해지자 이 악인들을 벌하기 위한 구체적인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당시의 내세를 나타내는 지도에 고뇌와 속박, 그리고 일정 기한의 처벌을 위한 나락(pit)이 등장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지옥은 지반 아래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때로는 땅 끝의 아주 먼 장소로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뉴저지의 시코커스(Secaucus) (역주: 뉴욕 지하철의 종점)나 인디애나의 사우스 벤드 같이 말이지요. 이 고통과 감금의 땅은 게헨나(Gehenna), 하데스(Hades), 불의 호수(the Lake of Fire), 불의 계곡(the Valley of Fire)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다음 2천년 동안, 고문 및 처형기술이 발달하면서 지옥에 대한 묘사 역시 점점 더 자세하게 변했습니다. 계시록의 불의 호수는 기독교 교세의 성장과 더불어 복잡한 고문실로 바뀌었습니다.

저자가 의심스러운 위경인 베드로 계시록에서 베드로는 지옥을 보고 돌아와 그곳에서 벌어지는 악인에 대한 끔찍한 고문을 묘사합니다. 불경스런 말을 뱉은 이는 혀를 묶어 매달리게 되고 간통을 위해 치장한 여성들은 끓는 진흙탕 위에 머리카락으로 달리게 됩니다. 살인자는 독사가 우글거리는 계곡에 던져지며 낙태한 여성은 배설물에 목까지 잠겨 자신들이 낙태한 아기들이 쏘는 불화살을 맞습니다. 빚의 복리를 매긴 자들은 무릎까지 오는 진흙과 배설물과 피로 가득찬 곳에 서있어야 합니다. 주인의 말을 듣지 않은 종들은 영원한 불에 고통을 받으며 영원히 자신의 혀를 깨물어야 하는 형벌을 받습니다. 성적 방종과 가난한 자를 돕지 않은 죄 역시 무서운 벌을 받게 됩니다. 단테가 묘사한 지옥은 역시 저자가 의심스러운 바울의 묵시록과 비슷합니다.

물론 모든 기독교 신학자들이 이런 영원한 처벌이라는 생각에 동의한 것은 아닙니다. 3세기 기독교를 전파한 이 중의 한 명인 오리젠은 심지어 사탄이라 하더라도 결국에는 천국으로 불려지리라 생각했습니다. 얼마전 미국교회사 겨울 학회에서 듀크대의 역사학자 엘리자베스 클라크는 지옥의 존재를 부인해 제명되었던 영국 카톨릭 예수회파의 한 인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복음주의파의 인기목사인 로브 벨은 지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유명해진 후 오프라 윈프리 방송사의 토크쇼를 맡았습니다.

사실 영원한 고문이라는 주장에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0억년 동안 고문을 하고도 멈추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다소 복수심에 가득찬 이로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사랑의 하느님이 사람들을 영원히 불에 타게 만들까요? 어떤 정의로운 하느님이 설사 그렇게 약속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빚을 영원히 갚도록 만들까요? 물론 우리는 그런 일을 하는 대상으로 신이 아닌 사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 역시 충분치 않습니다. 신의 전능은 사탄의 역사를 막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신의 정의와 사탄의 관계를 묻는 신정론(theodicy)의 약점입니다. 어쨌든 지금 우리가 가진 문제는 지옥에 대한 것이죠. 즉, 지옥이 정의와 무관함에도 왜 사람들은 지옥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죠.

이 문제에 대한 힌트를 초기 기독교에서 지옥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데이튼 대학의 메간 헤닝은 그녀의 책 “지옥 비유를 통한 초기 기독교인 교육(Educating Early Christians through the Rhetoric of Hell)”에서 “지옥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계몽 시대 이후에 등장한 질문이라고 말합니다. 처음 고문이 존재하는 사후세계를 만들어 낸 당시의 작가들은 지옥 자체에 대한 묘사보다 지옥을 이용해 사람들을 이상적인 시민으로 만드는 데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즉 지옥은 미래에 영혼이 겪을 운명이라기보다는 현재의 교육을 위한 목적을 가졌던 것입니다. 초기의 기독교인에게는 “누가 지옥에 있어야 하는가?”와 “왜 그들은 그곳에 있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지옥은 정말 존재하는가?”보다 더 중요했다는 것이지요.

헤닝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지옥이 비유로 쓰이는 방식과 당시에 쓰였던 방식은 매우 달라요. … [오늘날 지옥은] 한 사람의 구원여부를 통해 이분법적인 논리로 주어지죠. 이것은 과거의 개념을 시대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현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죠.”

나는 헤닝에게 현대사회에서 지옥은 어떤 위치를 가질 것인지 물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초기 기독교 인들처럼 지옥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보다 조심스럽게, 즉 다른 이들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하면서 행동하게 될 겁니다. … [그러나] 나 역시 기독교인으로써, 지옥이 정말 유용한 교육적 도구인지는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군요.”

오늘날의 기독교에도 여전히 지옥의 비도덕성과 야만성은 남아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아직 지옥을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장소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더 간단하고 성경의 근거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중세의 지옥이 가졌던 어떤 설득력을 더이상 오늘날의 지옥은 가지고 있지 않은 듯 합니다. 어떤 경우이건, 무신론자들이 하느님을 영원히 만나게 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는 변화가 없겠지요.

(데일리 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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