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죽음
2015년 1월 5일  |  By:   |  칼럼  |  No Comment

인문학은 대학에서 곧 사라지게 될까요? 이런 질문은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그건 마치 술집에서 알콜이 없어진다는 거나, 헐리웃에서 이기주의가 없어진다는 것을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알콜 없이는 술집이 없듯이, 인문학 없이는 대학도 없습니다. 만약 역사나 철학 같은 것이 학문 생활에서 사라진다면, 남는 것은 실용적인 기술 교육 시설과 기업 연구소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학원이나 연구소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대학이 아니고 그걸 대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만입니다.

하지만, 인문학이 다른 학과목과 고립되어 존재할 때 역시 온전한 의미로 대학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현실의 인간은 법이나 공학을 배우며 사상이나 가치는 실용적인 힘이 없어 보입니다. 인문학은 그 이름에 걸맞는 모든 대학의 핵심 교육 과정 속에 있어야 합니다. 역사와 철학 공부, 그리고 예술과 문학과 연관된 과목들은 예술가 뿐만 아니라 변호사나 공학자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인문학이 미국에서 존폐 위기에서 벗어난다면, 그 이유는 인문학이 고등 교육의 필수적인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문학이라는 것이 지금과 같은 모양새로 등장한 것은 18세기 경의 일입니다. 당시 이른바 인문 과목이라는 것은 결정적인 사회적 기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속적인 사회 질서가 챙길 겨를이 없는 종류의 가치를 보호하고 육성하는 것이었습니다. 현대 인문학과 산업 자본주의는 어느정도는 쌍둥이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잃어버릴 지 모를 가치와 사상을 보존하기 위해선 일상적인 사회 생활에서 격리된, 대학이라고 알려진 그런 기관들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고립과 격리는 인문학이 한심할정도로 비실용적일 수 있다는 점을 뜻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인문학은 사회 통념을 비판하는 기능을 가질 수 있게 됐습니다.

때때로, 1960년대 말 학생 운동이 그랬듯, 이런 비판은 거리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사는가”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 가”가 서로 충돌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 시대가 목격하는 것은 비판 활동의 중심지로서의 대학의 죽음입니다. 마가렛 대처 이후, 학문은 정의, 전통, 상상력, 인류 복지, 자유로운 사고나 미래에 대한 다른 비전 등이라는 이름으로 기득권과 싸우려 하기보다는 기득권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가 됐습니다. 단지 인문학에 관한 정부 투자를 축소하지 않고 늘린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 가치와 원칙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단지 렘브란트나 랭보를 배우는 데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진행되는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만이 변화가 가능합니다.

결국, “인문학은 돈이 많이 들지 않는 학문이니 축소하거나 배제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식으로 항의하는 것보다는, “인문학이 학문을 배우는 전체 사업에서 얼마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지”를 강조함으로써만 인문학은 방어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방어가 되었을까요? 재정적으로 말하자면 실패했습니다. 정부는 인문학을 확대하기보다는 축소시키려 합니다.

시인 셀리의 시를 가르치는데 많지 않은 투자를 하는 것이 국가 경제 경쟁력을 떨어뜨릴까요? 하지만 인문학 연구를 하지 않는 대학은 없습니다. 이 말은 대학과 고도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양립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의 정치적 함의는 등록금에 관한 질문보다 더 깊습니다.

원문출처: 가디언

날짜: 2015년 1월4일

번역: seemyey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