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키취의 힘
2015년 1월 2일  |  By:   |  문화  |  No Comment

20세기 초, 예술계에는 지각변동이 찾아왔습니다. 근대주의자(modernist)들은 현실도피주의(escapism)에 대해 진저리를 쳤습니다. 이들은 예술은 사람들의 삶을 그대로 비추어야 하며 오직 이를 통해서만 진정한 위안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건축가 아돌프 루스(Adolf Loos)는 모든 장식을 죄악이라고 선언하며 멋을 위해 달아놓은 손잡이와 소용돌이무늬로 꾸며진 비엔나 거리의 바로크식 건물 벽은 우리가 사는 이 현실에 대한 부정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아름다움은 사라진 과거에 속한 것이며, 현실의 우리에게 발견되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루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쇤베르크 역시 조성 음악(tonal music)은 진부(banal)하게 되었고 전통적인 작곡방식은 음악적 클리쉐를 만들어 낼 뿐이라며, 그가 한때 성취를 이루었던 낭만파의 음악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쇤베르크는 바흐와 모짜르트의 순수함과 정확성을 회복하기를 바라며 새로운 음악언어를 만들었습니다. 엘리엇과 파운드는 후스만과 월터 드 라 마레의 동화시(fairy tale poetry)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들은 시의 목표는 향수로 가득 찬 꿈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의 우리를 깨우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진정한 시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야 하고 시인의 세계관(frame of reference)은 이것이 가능하도록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이들로 하여금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시를 쓰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의 시는 빅토리아 시대의 현실 도피적 시와는 달리 이해할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동시에, 이런 과거의 방식들을 부정적으로 지칭하는 한 단어가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키취(kitsch)”입니다. 이 개념은 등장하자마자, 확고한 뉘앙스를 띄게 되었습니다. 어떤 행위도 키취가 되어서는 안 되었고, 이는 근대주의자들의 첫 계명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1939년 그의 유명한 에세이에서 예술가는 오직 두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전통적인 구상미술(figurative paintings)에 도전하는 전위(아방가르드)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키취에 속하게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키취일지 모른다는 예술가들의 두려움은 오늘날 예술계에 만연하는 공격성의 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작품이 아무리 외설적이거나 충격적이거나 짜증 나더라도, 적어도 키취만 아니라면 그것은 받아들여졌습니다.

키취라는 단어는 19세기 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누구도 이 단어의 정확한 어원은 알지 못합니다. 이 단어의 정확한 정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키취를 접할 때 그것이 키취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비인형, 디즈니의 밤비, 쇼핑몰의 산타클로스, 빙 크로스비가 부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머리에 리본을 단 푸들의 사진에서 우리는 키취를 봅니다. 크리스마스는 식상한 클리쉐들로 가득하며 이 클리쉐들은 처음 등장할 때의 순수함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산타클로스를 믿는 아이들은 동화를 실제 사실로 믿으며, 우리는 이 아이들의 믿음을 깨지 않기 위해 결과적으로 아이들을 속이게 됩니다. 물론 그 속임수에는 즐거운 면이 있습니다. 실제로 무언가를 믿는 척하는 그 자체는 우리의 기분을 좋게 만들며, 또 모두가 여기에 참여할 때, 이는 마치 사실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키취의 어원
키취라는 단어는 1860년에서 1870년 사이 뮌헨의 예술시장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이 단어는 값싸고 대중적이며 시장에 팔 수 있는 그림과 스케치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의 어원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

  • 독일어 사투리 중 지저분함(smear)을 뜻하는 ktschen
  • 독일어에 값싸게 만들다는 동사 verkitschen
  • 영어단어 스케치 또는 프랑스어 쉬크(chic)의 변형

체코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가 키취를 설명하며 사용했던 이야기는 매우 유명합니다. 그는 “키취는 두 번의 눈물을 연속해서 흘리게 만든다. 첫번째 눈물은 잔디밭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고 감동해서 흘리는 눈물이며 두번째 눈물은 잔디밭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모든 인류와 같이 감동하는 자신에게 감동해 흘리는 눈물이다”고 말했습니다. 즉 키취는 관찰되는 대상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이 아름답게 꾸미는 인형에 의해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형을 꾸미는 당신 자신에게 감동하게 됩니다. 모든 감정이 이와 같습니다. 키취는 감정을 대상이 아니라 관찰자로 향하게 하며 그 결과 그 감정을 실제로 느낄 필요 없이 그 감정에 대한 허상만을 불러일으킵니다. 키취적 작품은 당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를 보고 당신이 얼마나 멋있고 사랑스러운지를 느끼세요.” 이 때문에 오스카 와일드는 디킨즈의 가장 감상적인 죽음장면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리틀 넬의 죽음을 보며 웃지 않는 사람은 돌로 만들어진 심장을 가졌음이 틀림없다.”

이런 연유로 근대주의자들은 키취에 대해 공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19세기의 예술이 진실한 감정과 모호하고 자기 만족적인 대체물을 구별하는 능력을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구상미술과 조성음악에서, 클리쉐로 가득 찬 영웅시와 신화에서 우리는 인간성의 본질을 찾기보다 그저 허황된 대체물을 만들고 이것을 자랑스레 내어놓는 그런 동일한 병적 습관을 발견합니다.

물론 과거의 방식을 따라 하는 것이 금지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스타일을 진지하게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어떤 의도로 사용했든 간에 그 결과물은 키취로 대접받을 겁니다. 곧, 대중적이고 값싼, 노력 없이 만들어지고 생각 없이 소모되는 작품이 되는 것이죠. 구상미술은 크리스마스카드의 소재로 사용되며, 음악은 본질이 사라지고 감성만 남았으며, 문학은 클리쉐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키취는 거짓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수용자가 실제로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심오하고 진지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가진 가짜 예술입니다.

그러나 키취를 피하는 것은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자신이 전위임을 알리기 위해 지금까지 누구도 그것을 예술이라 부르지 않았던 행위들 – 예를 들어 고귀한 이상적인 사상이나 종교적인 상징을 파괴하는 것과 같은 – 을 시도한다 하더라도, 이 역시 새로운 종류의 클리쉐와 같은 거짓 행위가 되고 맙니다. 아무리 근대주의자의 태도를 취한다 한들, 그 시대의 본질을 파악했던 엘리엇, 쇤베르크, 마티스의 업적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더니즘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예술적 전통에 충실할 수 있는 능력과 그 전통을 벗어나 새로운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모두 필요로 합니다.

이것이 내가 “선제적 키취(pre-emptive kitsch)”라 부르는 새로운 예술장르가 등장한 이유입니다. 근대주의의 엄격함은 이루기도 어려우며 대중적 인기 역시 끌기 어렵습니다. 그 결과 예술가들은 앤디 워홀, 앨런 존스, 제프 쿤이 그랬던 것처럼 키취를 피하기보다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나쁜 것은 키취를 만들며 자신도 모르게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고, 차라리 그보다는 의도적으로 키취를 만들며 이것이 키취가 아닌 섬세한 패러디라고 말하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선제적 키취는 키취의 양쪽에 따옴표를 두름으로써 자신의 예술적 능력을 보호합니다. 마이클 잭슨이 자신의 침팬지를 안고 있는 도자기 조각상에는 황금색이 칠해져 있고 광택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성모가 아기를 안고 있는 자세로 감상적인 표정을 짓고 있음으로 인해 관객들에게 불편한 감정을 주었고, 이를 통해 키취가 아닌 키취가 되었습니다. 제프 쿤은 어쩌면 우리가 놓친 더 심오한 무언가를 의미하려 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이 작품을 키취에 대한 비평 또는 곧 키취가 키취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메타 키취를 의도했을 수 있습니다.

앨런 존스는 여성의 신체를 이용한 가구, 속옷을 이용해 만들어진 성적인 부위가 강조된 인형들, 여성에 대한 저속하고 유치한 시선, 패션모델들의 억지웃음과 같은 가짜 감정 등으로 이루어진 작품을 로얄 아카데미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들 역시 명백한 키취이며, 그 때문에 키취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작품들을 통해 우리 자신의 욕망에 대해 말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키취에 대한 과도한 경멸을 드러낸 것이고, 이를 통해 실은 우리가 키취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는 가장 이상적으로 치장된 프레임 속에 따옴표로 둘러싸인 쓰레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선제적 키취는 어떤 연속되는 흐름의 첫 번째 고리입니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중요한 척하며, 비평가는 그들의 작품을 평가하는 척, 그리고 근대주의는 이를 옹호하는 척합니다. 이 가장행렬의 가장 마지막에는 이런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고 그들을 예술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순간 이 흉내의 흐름은 끝이 나며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 주로 그 작품의 가격의 형태로 – 드러나게 됩니다. 물론 이 순간에도 속임수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예술작품을 구매한 이는 여전히 자신이 산 그 작품이 진정한 예술이며, 따라서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그리고 자신이 좋은 가격에 그 작품을 구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누구나 그 작품을 복제할 수 있다는 명백한 사실이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복제의 핵심은 그 결과물이 원본이 아니라 원본의 대체물이라는 것입니다. 평행한 거울 사이에 위치한 대상이 무한히 복제되듯이, 그리고 매 반복마다 조금씩 가격이 올라간 결과, 어떤 어린이도 생각해 낼 수 있고 대량생산도 가능해 보이는 제프 쿤의 풍선으로 만든 개는 생존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비싼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렇다고 그가 가장 위대한 예술가인 것은 아닙니다.

(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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