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응유전: 유전적 아버지가 아닌 수컷의 특징이 자식에게 전달되는 현상
2014년 11월 5일  |  By:   |  과학  |  No Comment

새로 태어난 아기를 보기 위해 일가친척이 다 모였습니다. 사람들은 아기에 대해 한마디씩 던집니다.  “어머 이 코는 아빠를 쏙 빼닮았네요!” “입술은 외할머니와 똑같아요!” 만약 이때 누군가가 “눈썹이 결혼 전 남자친구와 똑같은걸”이라고 말한다면 아내는 즉시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을 지을 것이고 신생아실의 분위기는 썰렁해질 겁니다. 하지만 초파리의 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지난 9월30일 생태학 전문지 “에콜로지 레터스(Ecology letters)”에는 뉴사우스웨일스대학의 연구진에 의해 초파리에게서 감응유전(Telegony)이 발견되었음을 알리는 연구가 실렸습니다. 감응유전이란 암컷과 먼저 교배한 수컷의 특징이 후일 그 암컷이 다른 수컷과의 교배로 낳은 새끼에게 전달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이런 이론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식에게 부인의 전 남편의 특징이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는 중세시대 왕들이 이혼녀와 결혼하는 것을 막는 논리로 사용되었습니다. 14세기 영국의 왕위 계승자였던 흑세자 에드워드가 이혼 경험이 있는 사촌 조앤과 결혼할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자손이 순수한 혈통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실제 근대 유전학이 발달하기 전인 20세기 초까지는 생물학자들 역시 남성이 어떤 형태로든 여성의 신체에 자신의 흔적을 남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유전자를 중심으로 한 멘델유전학이 발전하면서 감응유전은 과거의 망상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환경의 영향에 의해 유전자의 발현이 조절되는 현상인 후성유전학의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면서, 그리고 후성유전학과 상관없이 비유전자적 기제를 통해 환경 또는 부계의 특성이 자손에게 전달되는 현상이 여러 동물에게서 발견되면서 감응유전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번 연구는 감응유전이 비유전자적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최초로 실험적으로 확인한 연구이며 비유전자적 요소가 진화와 적응에 특별한 방식으로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암시하는 흥미로운 결과입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이들은 먼저 수컷 초파리들을 먹이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큰 초파리와 작은 초파리로 키웠습니다. 그리고 이 수컷 초파리들을 아직 생후 1주밖에 되지 않아 난자가 성숙하지 않은 암컷과 교배시켰고, 2주 뒤, 암컷들이 새끼를 낳을 수 있을 만큼 성숙했을 때 다시 교배시켜 새끼를 낳았습니다. 연구진은 암컷이 낳은 새끼가 먼저 교배한 수컷의 크기를 따라가는지, 또는 새끼의 유전자 아버지를 따라가는지를 관찰했고, 먼저 교배한 초파리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정액이 암컷의 몸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연구는 이미 여러 차례 보고된 바 있습니다. 정액에는 여러 종류의 화학물질이 포함돼 있습니다. 수컷은 정액을 통해 암컷의 행동을 바꾸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예를 들어 무당벌레의 경우 수컷의 상태에 따라 정액의 화학물질 구성이 바뀌며 이는 난자의 발달에 영향을 주고 정액의 화학물질들을 난자 속에 들어가게도 만듭니다.

연구진은 이번 실험의 결과를 먼저 교배한 수컷의 정액 속 어떤 물질이 암컷의 미성숙한 난자에 흡수돼 이것이 후에 태어난 새끼의 크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 발견은 진화와 적응에서 유전자 외에 다른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인 것으로, 수컷과 암컷이 이 요소를 고려해 서로 다른 전략을 사용하고 있을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예를 들어 약한 수컷은 건강한 수컷과 먼저 교배한 암컷과 교배함으로써 자신의 자손을 더 건강하게 만들려 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건강한 수컷은 약한 수컷과 먼저 교배한 암컷을 피해야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수컷은 암컷이 앞서 어떤 수컷과 교배했는지를 파악하는 능력을 키웠을 수 있습니다.

암컷 역시 난자가 미성숙했을 때는 훌륭한 정액을 가진 수컷을 선호하고, 난자가 성숙한 뒤에는 훌륭한 유전자를 가진 수컷을 선호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실험은, 아직 새끼를 낳을 가능성이 없는 암컷들이 왜 그렇게 까다롭게 수컷을 고르는지를 설명하는 실험일지 모릅니다.

인간에게도 이런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스튜어트 위그비는 이 기사를 보도한 일간지 <텔레그래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론적으로, 체내수정을 하는 모든 동물에게 감응유전은 가능합니다. 단지 그 증거가 충분치 않았습니다. 크린의 이번 연구는 곤충에게 그런 현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수정은 이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뤄지며, 따라서 이 방식으로 인간에게 감응유전이 일어날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연구자들이 제안한 방식, 곧 임신 중인 여성의 혈액 속에 태아의 유전자가 발견되는 것 같은 방식으로 감응유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있습니다.”

만약 인간에게도 감응유전이 발생하는 것이 확인된다면, 미혼 남녀는 결혼 전에 상대방이 앞서 만났던 사람들에 더 신경쓰게 될 지 모릅니다. 물론 이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녀가 먼저 사귀었던 남자에게도 무언가 장점이 있기 때문에 그녀가 사귀었을 것이고, 그 사람의 장점을 내 아이가 가지고 태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감응유전의 경계가 불분명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나라에서 부유한 남성과 사귀었던 여성은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아 건강한 상태일 것이며, 이는 이 여성이 다른 남성과 결혼한다 하더라도 건강한 아기를 낳게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또는 선진국에서 먼저 만난 남자에게 여성이 채식주의를 배웠다면 역시 아이의 신체에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이런 가상의 예는 성행위와 무관하게 먼저 번 상대방의 특징이 아이에게 영향을 끼친 예입니다.  또는 성병이나 기생충, 그리고 최근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인체 내 미생물군집에 먼저 사귀었던 남자가 영향을 주었다면, 이것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감응유전을 꼭 생물학적 특징으로 제한할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는 매일 매일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어떤 연인은 서로에게 하루키를 읽게하고, 말러를 듣게 하고, 양자역학을 설명합니다. 그들은 후에 자신의 아이들에게 하루키와 말러와 양자역학을 알려줄 것입니다. 아니, 꼭 그렇지 않더라도, 이미 그들은 서로를 통해 변했고, 그 영향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미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어떤 물리적 변화가 일어났느냐가 중요하며, 어느 만큼이냐, 그리고 그것이 측정가능한 양이냐가 역시 충분히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파리를 통한 이 발견은 충분히 새롭고 의미가 있는 결과입니다. 암컷 초파리는 첫 번째 수컷을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알아서 잘 하겠지요.

(Ecology Let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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