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들은 모나리자에 열광하는가
2014년 11월 4일  |  By:   |  과학, 문화  |  3 Comments

1993년 심리학자 제임스 커팅은 파리 오르셰 미술관에 인상파 작품 중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꼽히는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를 보러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작품 보다 옆 방에 있던 구스타프 카유보트의 눈 덮인 파리의 지붕을 그린 그림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이 일을 겪은 후 어떤 작품이 과연 위대한 작품이 되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장 떠오르는 답은, 그 작품이 실제로 뛰어나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뛰어난 작품은 미술관의 가장 좋은 자리에 걸리고 책과 언론에 오르내립니다. 그 작품을 알아보지 못하는 당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설명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회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즉, 이들은 예술적 가치가 이들의 과거와 관련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작품이 유명해지는 데에는 먼저 “단순 노출 효과(mere-exposure effect)”가 작용합니다. 1968년 이루어진 이 유명한 실험에서 사람들은 먼저 빠르게 지나가는 추상적인 형태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후 이들은 자신이 보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앞서 보았던 형태를 더 선호했습니다.

커팅은 코넬대학에서 자신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 효과를 미술작품에 대해 실험했습니다. 그는 수업 중에 덜 유명한 인상파 작품을 더 자주 보여주었고, 수업이 끝났을 때 학생들이 그 작품을 더 선호하게 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오늘날 널리 알려진 인상파 작품들이 이런 현상으로 인해 이득을 보았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 작품들은 19세기 말 유명한 몇 명의 부자들에 의해 사들여졌고 사람들은 이 사실에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그 작품들은 더 자주 언급되고 전시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작품들을 더 좋아하게 되었고, 학자와 비평가들도 이런 흐름을 따랐습니다. 앤디 워홀과 데미안 허스트가 말하듯이 비평은 대중성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커팅은 말합니다. “학자들도 이런 노출효과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일반 대중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사회학자 던칸 와츠가 “누적 이익(cumulative advantage)”이라고 부른 원칙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하던 와츠는 방탄유리에 둘러싸인 모나리자 앞에 길게 늘여선 사람들의 줄을 보고 의아해 했습니다. 사람들은 바로 옆 방에 있는 다빈치의 다른 작품들에는 왜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일까요?

그는 위대한 작품들의 평가가 과거 어떠했는지를 조사했습니다. 그는 1850년대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르네상스의 거장 티티아노나 라파엘 보다 훨신 못한 대접을 받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의 작품은 모나리자보다 열 배 이상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모나리자가 유명해진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였습니다. 그 계기는 학자들의 재평가가 아니라 바로 도난사건이었습니다.

1911년 루브르에서 일하던 한 남자는 모나리자를 자신의 겉옷에 숨겨 훔쳐냈습니다. 사람들은 그 때까지 주의깊게 보지 않던 그 작품의 도난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박물관이 다시 열었을 때 사람들은 모나리자가 걸려 있던 빈 자리를 보기 위해 줄을 섰습니다. 2년 뒤, 이탈리아의 목수 빈센초 페루자는 모나리자를 피렌체의 우피치에 팔려고 했고, 잡혔습니다.

프랑스인들은 분노했지만, 이탈리아 인들은 페루자를 거장의 작품을 고향으로 가지고 온 애국자로 대접했습니다. 전 세계의 언론이 이를 다루었고, 모나리자는 세계적 명성을 얻은 첫 번째 예술작품이 되었습니다. 모나리자는 서구 문명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919년 마르셸 뒤샹은 예술의 허상을 벗길려는 목적으로 모나리자에 염소 수염을 붙였지만 그의 작품 역시 모나리자를 더 유명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많은 이들이 모나리자의 특별함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모나리자의 눈이 관객이 어디에 있든지, 관객을 따라다닌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모나리자를 연구한 도날드 사순은 모든 초상화는 그런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콜럼비아의 사회학자 샤무스 칸은 예술에서 “위대한 작품”이 등장한 것은 신분상승의 욕구와 관련이 있다고 말합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에서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 사이의 경계가 모호했습니다. 오페라 가수와 마술사가 하나의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20세기로 넘어오면서 부자들은 중산층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오페라를 구경하기 위해 비싼 2층자리를 사고 인상파 작품을 구매하면서 “고급 예술”을 정의했습니다.

1960년대를 지나며 이런 문화의 구분은 약해졌지만, 여전히 문화는 자신의 정체성의 기준이 됩니다. 오늘날의 절충주의(eclecticism) – “나는 바하, 아바, 제이z 를 좋아해” – 는 보헤미안 중류층이 자신을 구별하는 새로운 방법입니다.

물론 한 예술작품이 위대해지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수준이 있어야 합니다. 모나리자가 가장 위대한 작품은 아닐지 모르지만, 적어도 처음 부터 루브르에 걸려있을 정도는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작품이 같은 사회적 효과를 얻는 것도 아닙니다. “햄릿”과 동시대의 다른 뛰어난 작품들을 읽었을 때 그 차이는 명백합니다. “죽느냐 사느냐”는 망설임, 탈선, 비틀거림을 통해 섬뜩한 의식의 환기를 통찰로 완성시킨 구절입니다. 같은 시대의 말로우나 웹스터의 독백과 비교할 때 셰익스피어는 단연 뛰어납니다.

“영국미학(British Journal of Aesthetics)”에 발표된 한 연구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학생들은 영국의 라파엘전파 화가인 존 에버렛 밀레이의 작품과 미국의 대중적인 화가 토마스 킨케이드의 작품을 반복적으로 보았습니다. 킨케이드는 저급 예술의 특징인 화려함을 풍경에 적용한 화가입니다. 연구진은 학생들이 점점 더 밀레이의 작품을 선호하게 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즉, 같은 노출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떤 작품을 더 선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위대한 작품이라 불리는 예술작품을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회학자들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지 않은 작품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전문가들도 위대한 작품과 평범한 작품을 쉽게 구분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가능한 한 많이 보고 읽어야하는 이유일 겁니다. 우리가 더 많이 이들을 접할수록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는 능력도 길러질겁니다. 절충주의자들은 이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텔리전트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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