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가 직접 쓴 <21세기 자본> 서평 [전문]
2014년 10월 21일  |  By:   |  칼럼  |  6 Comments

700쪽에 달하는 프랑스어를 번역한 경제학 논문을 읽는 것은, 흔히 괴짜라고 불리는 사람에게조차도 여름휴가 때 가볍게 시도할 만한 거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지난 7월, 저는 친구로부터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소개받고 몇몇 서평을 본 뒤 이 책을 꼭 읽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읽었다는 게 기쁩니다. 당신도 한 번 책을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만약 원문을 읽기 어렵다면 <이코노미스트>가 잘 정리한 요약본을 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지난달 저는 피케티와 스카이프로 통화하며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는 피케티에게 당신의 가장 중요한 결론에 동의하고 있으며 당신의 책 덕분에 우리 사회 지식인이 더 많이 부와 소득 불평등을 연구하게 되기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더 잘 이해할 수록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케티의 의견 가운데 아래 사항에 크게 동의합니다.
1. 불평등이 심해지면 경제적 동기부여가 훼손되고, 민주주의가 소수 권력자의 이득을 위해 기울게 되며,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이상을 저해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2. 자본주의는 불평등 심화를 자기 스스로 치유할 수 없다. 즉 부의 집중은 만약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으면 눈덩이처럼 점점 불어나게 된다.
3. 정부는 결심만 한다면, 그 눈덩이 효과를 상쇄시킬 건설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다.

다만 명백히 해두고 싶은 건, 불평등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 이 세상이 점점 나쁘게 변해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 실상은 중국, 멕시코, 콜롬비아, 브라질, 태국 등에서 중산층이 증가하는 덕분에 세계는 전체적으로 점점 더 평등하게 바뀌고 있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경향은 아마도 계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불평등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높은 불평등 상황을 두고 마치 우리 경제가 좋은 성과를 낸 증거라거나 우리 사회가 건강한 증거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더욱 나쁜 일입니다.

물론, 일정 정도 수준의 불평등은 처음부터 자본주의 안에 심어져 있습니다. 피케티가 주장하듯 불평등은 체제에 내재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불평등을 어느 정도 수준까지 수용할 수 있는가’입니다. 불평등은 어떤 시점부터 해악을 끼치기 시작하는 걸까요? 그건 우리가 공론장에서 논의해야 할 부분입니다. 피케티는 이런 진지한 토론을 이끌어 내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는 피케티와 다른 경제학자들이 고민해 봐야 할 몇 가지 중요한 결점이 있습니다. 피케티가 모은 역사적 자료 전체를 통틀어봐도, 그는 어떻게 부가 창출되고 어떻게 부가 사라지는지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 책의 핵심은 r>g 라는 간단한 방정식 하나로 요약됩니다. 여기서 r은 평균 자본 수익률이며 g는 경제 성장률입니다. 자본 수익률이 노동수익률을 웃돌게 되면 시간이 지날 수록 자본을 가진 계층과 노동에 의존하는 계층 사이의 빈부 격차는 벌어지게 됩니다. 이 방정식은 너무 중요해서 그는 이 공식이 “근본적인 발산력(force for divergence)”이며 “내 결론의 전체 논리를 요약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불평등을 이해하는데 과연 r>g 라는 공식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가 있는지 의문을 던지는 경제학자도 있습니다. 저는 이 분야에 전문가가 아닙니다. 제가 아는 것은 피케티의 r>g 공식이 자본의 여러 속성과 사회적 기능을 적절히 구별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세 가지 부류의 부자들을 생각해 봅시다. 한 사람은 자본을 자기 사업을 일으키는 데 쓰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자신의 부를 자선 사업에 쓰고 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자신의 부를 요트나 비행기 같은 것을 사는 데 대부분 소비합니다. 이 세 사람 부가 모두 불평등에 기여하는 게 사실이지만, 앞의 두 사람은 세 번째 사람보다 사회적으로 나은 가치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피케티는 이런 차이를 구분해 주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뒤에서 제가 언급할 정책적 함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결점은, 피케티의 r>g 분석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부의 축적을 저지하는 강력한 힘을 계산에 넣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미 부자가 된 가문이 다시 부를 세습하는 귀족사회, 특히 피케티가 불로소득이라고 부르는, 돈을 빌려주고 얻은 이자나 땅을 빌려주고 얻은 지세 등을 통해 부가 세습되는 사회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미국이 저런 사회에 가까이 가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미국 부자 순위 상위 400명 명단을 한 번 보십시오. 그중 절반은 (자신의 노력과 적당한 행운 덕분에) 기업을 일으켜 성공시킨 사업가입니다. 피케티의 불로소득 이론과는 달리, 조상이 18세기에 땅을 사서 그 지세를 축적해 부를 쌓은 가문의 사람은 저 400위 명단에 한 명도 없습니다. 미국에서 구세대 상속 부자는 사회적 불안정, 인플레이션, 세금, 기부, 지출 등의 이유로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시대가 지나면서 부가 쇠퇴하는 사례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20세기 초반, 헨리 포드를 비롯한 소상공인들이 자동차 산업에서 성공을 이뤘습니다. 자동차 회사 주식을 가지고 있던 대주주는 엄청난 이득을 누렸습니다. 이들 성공한 사업가는 예외적인 경우였습니다. 가문의 부를 자동차 산업에 투자한 불로소득자를 포함해 대부분은 1910년부터 1940년 사이 자신의 투자가 파산으로 끝나는 걸 지켜봐야 했습니다. 미국 자동차 산업은 224개 제조사에서 21개 사로 쪼그라들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부가 불로소득자나 다른 수동적 투자자에게 이전되는 대신,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다른 분야에서도 일어났습니다.

피케티 주장처럼 부를 눈덩이처럼 불리는 힘(예를 들어 부유한 집안의 아이가 고위층 네트워크에 접근할 수 있고 그래서 좋은 인턴직과 직장을 얻는 일)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부를 감소시키는데 기여하는 힘도 있습니다.

또 저는 피케티가 자산과 소득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반면 소비를 등한시하는데 실망했습니다. 소비 지표는 사람들이 구매하는 재화와 서비스 (식품, 옷, 집, 교육, 의료)의 양을 보여줍니다. 소비는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특히 부유한 사회에서는 (소비 대신) 소득이라는 측면으로 사회를 분석하는 것은 충분치 않습니다.

소득 자료가 현실을 오도할 수 있는 근거는 많습니다. 예를 들어 소득이 전혀 없고 학자금 대출만 가득한 의대 학생의 경우, 공식적인 통계상 이 학생은 극빈층에 속하게 되지만 실제 그는 미래에 높은 소득을 올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좀 더 극단적인 경우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아주 부유한 사람이 자기 주식을 팔거나 다른 형태의 소득을 얻지 않을 경우, 이 사람은 통계상 빈곤선 아래에 있게 됩니다.

물론, 소득이나 자산 자료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소비는 인간의 복지를 이해하는 데 더 중요한 자료입니다. 소비 통계를 통해 본 세상은 피케티가 그린 그림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소득, 자산과 함께 소비 자료도 같이 연구되기를 바랍니다.

비록 우리가 완벽하게 오늘날 사회의 양상을 파악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대책을 세워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피케티가 선호하는 해법은 소득보다 자본에 누진적 세금을 물리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세금 정책이 “끝없는 불평등의 순환고리를 끊고, 경쟁과 동기부여를 통한 원초적 부의 축적이 새로 탄생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 거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노동에 부과되는 세금을 줄여야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미국에서 자본에 부과되는 세금보다 노동에 부과되는 세금이 더 높은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로봇같은 자동화 공정이 인간 노동을 대체하고 더 고도의 작업을 수행하게 될 미래에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피케티가 선호하는 것처럼 자본에 누진세를 물리는 것보다, 저는 소비에 누진세를 물리는 것이 바르다고 봅니다. 앞에서 제가 예를 든 세 명의 부자 사례를 봅시다. 한 사람은 회사에 투자하고, 한 사람은 기부하고, 한 사람은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세 번째 부자가 딱히 무슨 잘못을 한 건 아니지만, 저는 앞의 두 명보다 세 번째 부자에게 더 높은 세금을 물려야 한다고 봅니다. 피케티가 지적했듯, 소비를 측정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정치후원금을 얼마나 냈는지 측정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자산세든 자본세든 정확히 과세하기 어려운 건 어디나 마찬가지입니다.

피케티와 마찬가지로 저는 상속세를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상속으로 소비하는 것을 방관하거나 운 좋게 부자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이유에 기반해 자본을 불균형하게 분배하는 것은, 자원을 배분하는 공정하고 현명한 방법이 아닙니다. 워런 버핏이 즐겨 말하듯이 “2020년 올림픽 선수단을 2000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장남으로 채우는” 것과 같은 겁니다. 상속세를 유지하고 그 돈으로 교육과 연구에 투자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게 장차 국가를 강하게 만드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자선활동도 하나의 중요한 해법이 될 수 있습니다. 피케티가 이 부분에 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은 건 유감입니다. 백 년도 훨씬 더 전, 앤드루 카네기가 부의 상당 부분을 사회에 환원하자고 주장했을 때 그의 목소리는 동료 부자 사이에서 외롭게 들렸습니다. 지금은 그런 식의 사회 환원을 약속하는 부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자선 활동은 사회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세습 가문의 부를 감소시키는 효과도 있습니다. 제 아내 멜린다와 저는 부의 세습이 사회와 자녀 개인 모두에게 좋지 않다고 강하게 믿습니다. 전 우리 아이들이 스스로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물론 제 아이들은 여러 이점을 누릴 수 있겠지만, 그들의 삶과 직업은 오로지 그들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부와 불평등에 대한 토론이 당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저는 마법의 해결책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피케티의 이 책이 몇몇 결점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논란만큼이나 빛을 던져 줬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중요한 주제에 대해 빛을 던질 다른 연구도 더 보고 싶습니다.

원문출처: 빌게이츠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