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판 우생순 여자축구 대표팀, 월드컵을 겨냥하다
2014년 10월 16일  |  By:   |  스포츠  |  No Comment

미국 인디애나 주의 사우스벤드라는 작은 마을. 미국 어린이들이 방과후 활동으로 공을 차고 축구를 배우는 영락없는 동네 잔디밭에서 아이티 여자축구 대표팀은 훈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말이 좋아 대표팀이지 협회로부터 지원 받는 훈련 수당은 한푼도 없고, 20명 남짓한 선수들이 아파트 두 집에 어렵게 세를 내 합숙 아닌 합숙을 하며 지냅니다. 지구 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아이티입니다. 축구협회에 돈이 있을리 없죠. 협회가 가까스로 지원하는 건 1년에 한 차례 훈련지(미국)를 오가는 왕복 항공권입니다. 지난해에는 훈련수당으로 선수 한 명에게 20만 원씩 지급했는데, 올해는 예산이 부족하다며 이마저도 끊겼습니다. 지원은 열악하지만 대표팀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내년 캐나다에서 열리는 FIFA 월드컵에 카리브해 국가로는 처음으로 출전하는 겁니다.

내년 대회부터 참가국이 16개 나라에서 24개 나라로 확대되는데, 개최국 자격으로 출전하는 캐나다를 제외하고 북중미-카리브 대륙에는 3장의 진출권이 배당됐습니다. 세계 최강 미국과 강호 멕시코가 이변이 없는 한 두 장을 가져갈 것으로 전망되고, 나머지 한 장을 놓고 아이티는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자메이카, 트리니다드토바고 등과 치열하게 다툴 것으로 예상됩니다. 4위를 해도 남미 지역예선 3위를 차지한 에콰도르와 플레이오프를 거쳐 월드컵 무대를 밟을 수 있습니다.

아이티 대표팀 선수들은 모두 2010년 대지진의 트라우마를 여전히 겪고 있습니다. 눈 앞에서 사랑하는 가족이 죽거나 다쳤고, 무너져내린 건물 잔해 더미를 몇 달이고 헤매고 다니다 사랑하는 이의 주검을 발견한 선수들도 있습니다. 집에 있었다면 꼼짝없이 희생됐을 거란 생각에 악몽을 꾸고, 여전히 높은 건물에 들어가거나 근처를 걷는 걸 불안해하는 선수들도 많습니다. 축구협회 건물도 지진 당시 무너져 그 안에 있던 대표팀 감독과 주전급 선수 여러 명을 비롯해 30여 명이 숨졌습니다. 유일한 국립경기장은 난민촌으로 변했고, 난민촌에 콜레라가 창궐하면서 그대로 산 송장이 넘쳐나는 무덤이 되기도 했습니다. 축구팀에게는 그마저 있던 열악한 기반마저 부서진 셈이죠.

이들의 축구 실력은 어떨까요? 분명 세계적인 강호들에 미치지 못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선수들 개개인의 기량과 잠재력은 높은 팀입니다. 보르코프스키(Shek Borkowski) 아이티 여자축구 대표팀 감독은 2012년 런던올림픽 예선전 영상을 보고 선수들의 잠재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이티 축구협회에 전화를 걸어 팀을 맡고 싶다는 뜻을 전했죠. 조건은 간단했습니다.

“선수들이 일 년 중 여섯 달 미국에서 훈련할 수 있도록 이동 경비와 최소한의 장비만 지원해달라고 했어요. 나머지 운영 경비는 어떻게 해서든 충당하겠다고 말했죠. 지금 생각해도 미치지 않고서는 내리기 어려운 결정이긴 했죠. 급여요? 한 푼도 없어요. 당연히 돈 보고 내린 결정이 아닌걸요.”

축구협회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고, 2012년 사우스벤드에 처음으로 훈련 캠프를 차렸습니다. 협회는 비행기표는 끊어주었지만, 장비 지원은 사실상 전무했죠. 선수들은 훈련 외로 동네 꼬마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거나 요리를 하고 티셔츠를 팔아 운영 경비를 스스로 충당해 왔습니다. 완전한 자급자족은 아니었죠. 하지만 지역 사회가 아이티 대표팀을 환영했습니다. 지역 축구 클럽은 대표팀이 무료로 축구장을 쓸 수 있도록 허락했고, 지역 사업가인 듀메(Marc Dume) 씨는 중고 승합차를 대표팀 차량으로 쓰라고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동네 카센터에서는 차량에 이상이 생기면 무료로 정비를 해주겠다고 약속했죠.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자 축구 선수인 앤 마리 라이트(Anne Marie Wright) 양도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습니다. 앤 마리는 지난 여름 자신의 생일 때 부모님과 친척, 친구들에게 생일선물 대신 돈을 모아 아이티 대표팀에 필요한 축구 장비를 선물하자고 제안했고, 아예 모금 웹사이트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앤 마리 덕분에 선수들은 새 축구화와 양말을 신고 훈련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생수도 빼놓을 수 없죠. 처음엔 물병도 없어서 선수들은 수돗물로 갈증을 해소하며 훈련을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축구에 집중하기에는 선수들의 삶이 너무나 척박합니다. 대부분 아이티에 있던 집은 지진으로 무너져 아이티에 가도 머물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보수적인 아이티 사회의 시선도 선수들의 힘을 빠지게 합니다. 여전히 “여자가 무슨 축구냐”며 손가락질하는 이들이 수두룩하고, 대표팀 선수들은 누구나 어렸을 때부터 남자들, 심지어 어린 남자아이들로부터도 여자라는 이유로 축구를 할 자격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부모님이나 친척들 가운데 축구를 하는 걸 못마땅해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언제까지 축구를 할 수 있을지도 정해진 게 전혀 없습니다. 어떤 선수는 출산과 함께 선수 생활을 접었고, 또 다른 선수는 아이티에 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홀로 남은 어머니가 신경 쇠약이 극심해져 어머니를 보살피러 가기 위해 대표팀을 나갔습니다. 현재 대표팀 선수 가운데 두 명은 비자 문제 때문에 아이티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지난 4월 우들린 로부스트(Woodlyne-Robuste) 선수의 아버지가 숨졌다는 비보가 전해졌을 때, 아이티 축구 협회는 예산에 난색을 표하며 아이티로 오는 비행기표는 끊어줄 수 있지만, 훈련지인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비행기표는 끊어주기 어렵다는 뜻을 전해왔습니다. 우들린 로부스트는 고심 끝에 미국에 남아 훈련을 계속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생각만 하면 아버지한테 너무 죄송하고, 아직도 가슴이 한없이 무거워져요. 하지만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땀을 흘리면 괴로움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어요. 반드시 월드컵에 진출해서 아버지를 위해 골을 넣을 거예요. 제게 처음으로 축구화를 사주신 분이 바로 아버지거든요.” (New York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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