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내 성범죄 문제, 교칙대로 합시다?
2014년 10월 8일  |  By:   |  세계  |  1 comment

미국의 대학에는 모든 성적 접촉 시 단계별로 상대의 동의를 구하도록 하는 교칙이 있습니다. 20년전 오하이오 주의 한 대학이 최초로 이러한 교칙을 도입했을 때만해도 코미디쇼 <새터데이나잇라이브>를 필두로 전국민의 조롱거리였지만, 여러 대학이 비슷한 방침을 택하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죠. 그리고 지난 달 말,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대학이 이른바 “동의해야만 동의한 것이다(Yes Means Yes)” 조항을 교칙에 넣어야만 주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법안에 서명했습니다. 이 교칙에 따르면 학생들은 성적 접촉 전 반드시 언어적, 또는 명확한 비언어적 신호로 상대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이 규칙은 매 단계마다 새롭게 적용되기 때문에, 키스에 대한 동의를 구했다 하더라도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 새로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동의는 상황이 진행되는 중에라도 언제든 철회할 수 있습니다. 침묵이나 저항의 부재를 동의로 해석해서는 안되며, 상대가 술에 취해 동의 자체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성적 접촉은 폭력으로 간주됩니다.

해당 교칙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이런 규정이 학생들에게 “동의없는 성적 접촉은 모두 성폭력”이라는 개념을 확실하게 심어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반면 뻣뻣한 잣대로 성인들의 성생활을 구속하려는 부자연스러운 규정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규정대로라면 상대에게 손이라도 올렸다가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야”라는 말을 듣는다면 이미 성폭력을 저지른 셈이 된다는 것이죠. 이들은 어줍잖은 교칙으로 학생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것 보다, 범죄가 일어났을 때 경찰에게 사건 해결을 일임하는 것이 더 나은 해결책이라고 말합니다. 과거 대학 캠퍼스에서 일어난 성범죄를 처리하는 것은 대학의 몫이었습니다. 진상 규명과 처벌도 법적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대학 내부인들끼리의 비공개 회의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해결에는 위험성이 따릅니다. 합리적 의심보다는 증거 우위의 법칙에 따라 죄인이 가려지고, ‘용의자’는 변호인의 도움도 교차 심문의 기회도 얻지 못합니다. 징계를 받는다고 감옥에 가는 것은 아니지만, ‘강간범’이라는 낙인이 평생을 따라다닐 수도 있죠. 그러니 제대로 된 수사를 통해 증거를 수집해서 확실히 범죄 여부를 밝혀낼 수 있는 외부 기관에 사건 해결을 맡기자는 것이 반대파의 주장입니다.

미국에서 성범죄는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1995년부터 2005년 사이 성폭력 범죄가 60%나 줄어들었다는 조사 결과도 있죠. 대학이 대학 밖의 공간에 비해 딱히 더 위험한 공간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는 대학 내 성범죄에 강력 대응하라는 압박이 전례없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관련 시민 단체들은 대학 캠퍼스에 “강간 문화”가 만연하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지난 9월 18일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나서 대학 내 성범죄 퇴치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2011년에는 교육부에서 각 대학에 성범죄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타이틀 4(Title IX)’라고 불리는 연방 차별금지법을 어긴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지침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교육부는 여대생 다섯 명 중 한 명 꼴로 성범죄의 피해자이거나 피해자가 될 뻔한 경험이 있다는 통계를 지침의 근거로 삼았지만, 일부에서는 이 통계가 ‘성범죄’의 정의를 너무 넓게 잡은데다 조사 대상은 충분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기도 했죠. 올 초, 정부는 이 법을 위반해 조사 대상에 오른 학교의 명단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하버드, 프린스턴, 버클리를 비롯한 70개 대학이 그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점점 더 많은 학교들이 엄격한 교칙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미국에서 대학은 정부로부터 자율성을 보장받는 편이었지만, 성범죄에 관해서만은 예외가 되는 추세입니다. (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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