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대학에 다니는 가난한 학생들이 고전하는 이유
2014년 9월 25일  |  By:   |  경제, 칼럼  |  1 comment

옮긴이: 이 글은 뉴욕시 교육청에서 일하는 비키 매든(Vicki Madden)이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저는 맨해튼 도심에서 지하철을 갈아타기 위해서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젊은 남성이 제 앞으로 끼어들면서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케빈!” 우리가 서로 반가움의 포옹을 하는 동안 저는 지금이 몇 월인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3월이었습니다. 저는 왜 그가 학교가 아니라 뉴욕시에 있는지를 생각하고 있었고 케빈은 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한 해 동안 휴학하기로 했어요. 모든 사람이 제가 대학을 계속 다녀야 한다고 말했지만 전 솔직히 제가 대학에서 뭘 하고 있는지 도대체 모르겠어요.” 저는 케빈에게 저 자신도 대학 때 한 해 휴학을 했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혹시 조언이 필요하면 제가 케빈을 가르쳤던 브루클린에 있는 학교에 있는 상담 선생님에게 연락을 해보라고 조언을 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저는 케빈이 상담 선생님에게 연락하지 않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몇 달 뒤 저는 제가 가르쳤던 다른 학생을 브루클린에 있는 식료품점에서 마주쳤습니다. 그 학생 역시 돈을 벌기 위해 휴학 중이었고 9월이 되면 다시 학교로 돌아갈 테니 걱정 말라고 저를 안심시켰습니다. 동시에 그 학생은 자신이 다니고 있는 메인주에 있는 명문 대학을 떠난 자신의 친구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저소득층 학생들을 명문 대학에 입학시키려는 노력은 최근 뉴스에 자주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가르쳤던 학생들의 사례나 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과연 가난한 학생들을 명문대학에 입학시키고 졸업시키는 데 걸림돌이 되는 장애물들이 줄어들긴 한 것인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아메리칸 드림의 핵심은 교육, 즉 교육을 통해서 사회 계층 이동이 가능하다는 우리의 집단적 믿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그 어느 때보다 소득과 부에 따라 나뉘어 있습니다. 저소득층 출신 학생들이 명문 대학에 입학했을 때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이 학생들은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사회적 고립감과 소외감은 중요한 원인입니다. 최근 미시간 교육 대학원의 연구로는 미국에서 가장 좋은 193개 대학에 입학한 학생 중에서 14%만이 소득 분포 하위 50% 출신 학생들이었습니다. 소득 분포 하위 25% 출신 학생의 비율은 5%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소득층 학생들이 경험하는 어려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1978년에 시애틀에서 심야 비행기를 혼자 타고서 바나드(Barnard) 칼리지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제가 캠퍼스에서 만난 친구들은 아주 낯설었습니다. 친구들의 부모님 중에서는 아이비리그를 졸업하신 분들이 계셨고 테니스를 취미로 즐기셨습니다. 반대로 저는 네브래스카주 동쪽으로 와본 적도 처음이었고 저희 어머니는 우체국에서 일하시면서 다섯 명의 아이를 키우셨습니다. 우리 집 뒤뜰에서는 염소를 키웠는데 이는 쓰레기에 처리하는 비용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뉴욕시에서 가르쳤던 학생들은 프랭클린(Franklin), 마샬(Marshall), 바나드(Barnard), 바드(Bard), 콜비(Colby)와 같은 대학에 입학했는데 그들의 상황은 저와 비교하면 훨씬 나은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은 뉴욕시에서 자랐기 때문에 도시 문화를 알고 있었고 초밥을 먹어본 적도 있으며 박물관과 미술관에 가본 경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학도시에서 이 학생들이 경험하는 어려움은 제가 경험했던 것과는 또 다른 것이었습니다. 학교 행정당국과 의사소통에 오해가 있었거나 부모님의 소득이 조금 상승했다는 이유로 학교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경우에 이것이 학생들에게는 학교를 그만둘 이유가 되었습니다. 700달러의 여유가 없어서 힘들어하는 학생들인데 대학 등록금을 낼 여유가 있을 리 없지요. 명문 대학에 입학한 저소득층 학생들은 학교 공부를 따라가는데 애를 먹긴 하지만 학생들은 결국 어느 정도 학교 공부를 따라갑니다. 이들이 겪는 진짜 어려움은 교수님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거나 다른 친구들과 공부 모임을 만들어서 학업 부담을 관리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 편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선생님들이 학교 공부나 대학 지원 과정 하나하나에서 학생들을 챙겨주었지만, 이들이 대학 캠퍼스에 도착하는 순간 이들은 자신들이 나머지 학생들과 다르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엘리트 학교일수록 이들이 느끼는 격차는 더 큽니다. 제가 대학에 처음 갔을 때 저는 호머(Homer)가 뭔지도 몰랐고 뉴욕타임즈를 읽기도 어려웠습니다. 단어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뉴욕타임즈의 기사를 이해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저는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제가 시애틀의 가난한 환경에서 경험했던 것들의 가치가 평가 절하될 뿐만 아니라 때때로 놀림감이 되거나 멍청하거나 저소득층 사람들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또 제가 다녔던 바나드 칼리지에 있는 그 어떤 학생도 우리 가족이 자주 먹었던 싸구려 치즈를 먹지 않았습니다.

도시에서 자란 저소득층 학생들이 대학만 있는 소규모 도시에 갔을 때 겪는 어려움은 다른 것입니다.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제 학생 중 한 명은 주변 친구들로부터 밤에 후드티셔츠를 입고 돌아다니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칫하다간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저소득층 학생들은 대학에서 4년을 보내고 졸업을 하기까지 자신이 살아온 세상의 경험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갈아타야 하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소득 격차가 점점 더 커지면서 사회 계층을 바꾼다는 것은 한 사람이 태어나서 자란 세계와 앞으로 속할 세계 사이에 더 큰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 같은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대학에서 학문적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는 있습니다. 진로 상담 선생님은 어떤 대학을 갈지에 조언을 해 줄 수 있고 연방 재정 보조 프로그램도 이 과정에서 도움을 줄 수가 있죠. 하지만 우리는 저소득층 학생들이 격을 영혼의 혼란스러움과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감정에 준비되도록 돕지는 못합니다. (New York Times)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