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들의 침묵, 나는 여전히 이렇게 생각한다
2014년 2월 3일  |  By:   |  세계  |  No Comment

-지난 주에 뉴스페퍼민트에서 소개한 이코노미스트 칼럼 “가난한 자들의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에 대한 답변 형식의 칼럼입니다.

이코노미스트에 실린 내 동료의 칼럼을 통해 저는 제가 5년 전에 쓴 글이 매트 밀러의 워싱턴포스트 칼럼에 인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밀러는 칼럼에서 “불평등의 정도가 심해지고 있음에도 왜 미국의 빈곤 계층은 개선을 강력하게 요구하지 않는가”하는 문제에 대한 저의 주장을 인용하며 이에 동조하였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도 더 나은 물건을 가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물질적 불평등이 소득 불평등만큼 크게 느껴지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저의 주장이었죠.

밀러가 인용한 글을 썼던 당시에 저는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지만 소비 불평등은 제자리걸음 중이라는 공식 통계를 활용하였습니다. 저의 동료는 이를 반박하는 최신 데이터가 있다고 했지만, 저는 이 새로운 자료가 미국에서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 현실을 설명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비와 관련된 데이터는 사람들이 돈을 얼마나 쓰고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뿐이지, 같은 돈을 썼을 때의 경험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를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의 동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불평등의 문제는 다만 소비재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엘리자베스 앤더슨 교수의 글을 인용합니다. 앤더슨 교수는 불평등이 심화된 사회에서 부유층과 빈곤층이 공유하는 이해관계가 점점 줄어들고, 따라서 부자들은 사회 전체가 누릴 수 있는 공공재 확충에 반대하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아주 흥미로운 주장입니다만 동시에 의심스러운 주장이고, 저의 동료나 앤더슨 교수 모두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대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에서 빈민들의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미국 사회의 불평등이 이미 너무 심화되어 공공재마저 파탄 상태에 이르렀고 따라서 빈민들은 정치적 저항 운동을 일으킬 능력과 여유마저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제 동료와 앤더슨 교수가 불평등 때문에 파괴되고 있는 공공재의 예로 든 것들, 즉 치안 상황이나 공공 교육, 기본 인프라 등은 오히려 지난 수 십 년에 걸쳐 좋아지고 있으니까요. 또한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불평등의 정도가 심해질 수록 경제적 이동성도 낮아져야 하지만, 최근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에서 불평등이 심화된 세월 동안에도 경제적 이동성은 일정한 수준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불평등 자체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불평등이 초래하는 문제 때문에 불평등이 문제”라는 주장을 펼치려면, “불평등이 초래하는 문제”가 실제로 얼마나 심각한지를 확고한 근거와 함께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소비재(와 공공재!)의 질이 높아졌다는 사실이 빈민들의 침묵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절대적 소득 격차가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오지 않는 이유는 오히려 미국인들이 사상적으로 평등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도 사상적인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미국인들이 불평등 자체에 큰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한 불평등을 빌미로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합니다. 거국적인 사상의 변화를 일으키려면, 일단 평등주의자들이 보다 설득력을 갖추고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Economist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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